지난 5월 1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충현동의 한 지하상가. 출근한 사람들이 바삐 일상을 준비할 무렵, 상가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노인이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수차례 일어서려 시도해 보지만 계속 심장이 쿵쾅대고 머리가 어지럽다. 결국 일어서는 걸 포기하고 눈을 감은 채 커피숍 외벽에 기대앉는다. 수많은 사람이 상가를 지나가지만 노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이때 커피숍 맞은편 종근당안경원 사장 김민영 씨가 다가온다. 처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다.
지난 1일 안경원에서 기자와 만난 김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모두 어르신을 투명 인간 취급하더라. 다들 외면하고 지나치길래 저도 처음엔 어르신이 잠깐 쉬고 싶은데 앉을 자리가 없어 구석에서 쉬고 계신 줄 알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노인은 한자리에 한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뭔가 문제가 있으신가’ 생각하며 안경원 안에서 유심히 노인을 들여다본 김 씨는 깜짝 놀랐다.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상태로 노인이 쓰러져 있는 것이다.
순간 ‘저렇게 계시면 돌아가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김 씨는 얼른 노인에게 다가갔다. “어르신, 어디 아프세요”라고 묻자 노인은 “아, 내가 여기서 저만큼 조금 걸어가려 해도 못 가겠네”라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김 씨는 “상황이 안 좋으신 것 같으니 119 불러드릴까요”라고 물었으나 노인은 “부르지 말라”며 거절했다. “119구급대 불러서 병원에 가셔야 해요. 위험해요”라고 여러 번 설득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자꾸만 119 신고를 거절하던 노인은 힘겹게 입을 뗐다. “내가 기초생활수급자라서…….” 김 씨는 그때 깨달았다. ‘아 돈이 없어서 못 가시는 거구나.’
노인은 한 달 40만 원 지원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당시 방 월세를 내야 해서 상가 건물 안에 있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 돈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월세를 내면 남는 돈이 별로 없기에 차마 병원에 갈 생각을 못한 것이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노인은 당시 휴대전화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김 씨는 재빠르게 안경원으로 돌아가 현금 20만 원을 챙겨 나왔다. 그는 노인의 손에 돈을 쥐여주며 “어르신, 이 돈 안 갚으셔도 되니까 얼른 병원에 가셔야 해요. 이러다 큰일 나요. 목숨이 우선이에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노인도 “너무 감사합니다”라며 119에 신고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 씨는 어떻게든 골든타임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돈을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건데 그거 드리면 어때요. 제가 화장품 하나 덜 쓰고 옷 하나 안 걸치면 되는 건데, 옷 걸치는 게 뭐 대단한 거예요. 저 또한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누군가의 도움 없으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했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남 도우며 살고 싶어”
노인은 병원에서 치료받고 무사히 퇴원했다. 당시 의사가 “바로 병원에 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할 정도로 노인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목이 마구 타오르는 느낌과 함께 생전 겪어보지 못한 아픔이었다고 한다. 김 씨는 “어르신이 그때 협심증이나 심근경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제가 큰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면부지인 자신을 살린 김 씨에게 감동한 노인은 충현동장과 함께 안경원을 찾았다. 한 손엔 케이크를, 다른 한 손엔 20만 원이 담긴 봉투를 들고 온 노인은 “정말 생명의 은인이다. 너무 고맙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김 씨는 어르신이 찾아온 순간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라며 엄청나게 놀랐다고.
김 씨는 “찾아오실 줄 상상도 못 했다. 저의 조그마한 도움이 이분을 눈물짓게 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감동스러웠다. 제가 이분을 살리지 못했으면 이런 광경을 보지 못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눈물이 나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삶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이렇게 좋은 분을 제가 돕지 않았으면 영영 잃을 뻔한 거 아니냐”라며 눈물을 훔쳤다.
노인은 어려운 사정에도 자신보다 더 힘든 상황의 이웃을 위해 매달 10만 원씩 기부한다고 한다. 김 씨는 “이런 분을 제가 살렸다니 너무 뿌듯했다. 제가 이분을 도와드리고, 이분이 또 다른 분을 도와드리고, 이렇게 연쇄적으로 서로가 도움을 주는 게 너무 아름다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이야기 들으니까 세상 살맛 나지 않아요?”라며 웃어 보였다.
인터뷰 도중 보행기를 끄는 한 할머니가 안경원 문을 열지 못해 힘겨워하고 계셨다. 김 씨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드리며 시원한 음료 한 잔을 내드렸다. 중간중간 단골이나 주변 상인들도 찾아와 “테레비 나오셨던데 한턱 쏘셔야죠” “너무 멋있으세요” “정말 감사드려요” 등의 말을 건넸다. 김 씨의 선행이 기사를 통해 알려져서다. 김 씨는 연신 “별것 아닌 걸 과대하게…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라며 민망해했다.
30년 동안 안경사 일을 하며 충현동에서는 25년간 안경원을 운영 중인 김 씨는 처음부터 안경사를 꿈꾸진 않았다. 그의 꿈은 사실 의사였다. 김 씨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 어떤 게 있을까 고민하다가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시집을 일찍 와서 열 식구 밥해 먹이고 찌개 끓여가며 공부해 의대를 넣었는데 떨어졌다. 그때 더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에 붙었으면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고 사람 생명을 더 많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아쉬운 부분이 있다”며 “계속 여운이 남아서 공부를 해보려 했지만 여러 여건이 안 좋았다”고 털어놨다.
새 옷 입고 나가시면 헌 옷 입고 들어오시던 할아버지
타인을 도우며 살아야겠다는 그의 가치관은 가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김 씨의 증조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셨다고 한다. 또 친할아버지는 새 양복을 입고 집 밖에 나갈 때마다 항상 헌 옷을 입고 집으로 들어오셨다고. 김 씨는 “고모가 말씀하시길, 할아버지는 후줄근하게 입은 사람들 옷을 다 벗겨서 자신의 옷을 입히고 본인은 거지 같은 옷을 입고 들어왔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는 “요즘에 사람들이 깨끗하게 안 입고 길에 누워있으면 노숙자나 술에 취해서 자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쓰러져 있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하지 않나. 그래서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 근처에 다가가지 않는 것 같다. 그럼 그 사람은 그렇게 죽는다”며 “이렇게 오해받지 말라고 할아버지가 지저분한 사람들의 옷을 벗겨서 본인 옷을 입혀준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씨는 장애인 지원 단체에 몇 년간 매달 기부도 했다. 그는 “항상 다달이 기부하다가 한 번 돈을 못 냈더니 (단체 측에서) 전화로 안 좋은 소리를 하시더라. 사실 기부는 자발적인 거고, 갑자기 형편이 안 되면 못 낼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며 “그 단체로의 기부는 끊고, 제가 직접적으로 어려운 분들을 도울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남들에게 폐 끼치면 안 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김 씨는 요즘 세상이 너무 삭막해진 것을 느낀다고. 김 씨는 “제가 쓰러진 어르신께 20만 원을 드렸을 때 건물 관리실 직원이 연락처를 받아 놓으라고 하더라. 제가 ‘괜찮다. 그냥 드린 거다. 돈 받을 생각 없다’고 하니까 놀라시더라. 요즘 세상이 그런 가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좀 더 따뜻한 세상이 되길 바란다.
“쓰러진 사람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봤을 때 무조건 손 잡아주는 수밖에 없어요. 버려두면 목숨을 잃을 수 있잖아요. 그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고, 나도 갑자기 길에서 쓰러지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각박한 세상에서 서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 생명만큼 소중한 게 어디 있겠어요.”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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