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아부터 사교육 굴레]
교육 전문가들 부작용 경고
“놀이 대신 암기-문제풀이 집중… 잦은 분노 등 정서불안 불러”
경기 하남시에 사는 직장인 정모 씨(40)는 유아 영어학원(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아들(5)을 일반 유치원으로 옮길지를 두고 몇 주째 남편과 고민 중이다. 올 들어 숙제가 부쩍 늘고 아들이 짜증을 내며 등원을 거부하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정 씨는 “한글도 못 뗀 아이한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내년이면 과제가 더 많아진다는데 아이가 공부에 흥미를 잃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자녀를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부모들의 첫 마음은 비슷하다. 조금이라도 어릴 때 영어를 접해 부모 세대와 달리 영어를 편히 배우고 자연스럽게 구사하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면 성과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경우가 많다. 서울의 한 영어유치원 교사는 “천천히 즐겁게 가르치고 싶어도 한 달에 200만 원을 투자하는 부모들은 ‘퍼포먼스(성과)’를 원할 수밖에 없다”며 “선택받는 영유가 되려면 ‘A를 졸업하면 프리토킹이 되고 원서를 줄줄 읽는다’는 말이 나오게 끌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영어 학습 연령대가 너무 낮아진 것도 문제지만, ‘레벨’과 ‘입시’를 목표로 한 주입식 교육이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임동선 이화여대 언어병리학과 교수는 “유아기엔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언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것이 중요한데, 대다수 영어유치원은 ‘학습’에 초점을 맞춘다”고 지적했다. 영유아 언어 교육은 ‘놀이’를 기반으로 해야 함에도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암기와 문제풀이, 과제에 교육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 아동학 박사인 권윤정 맘모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 원장은 “5∼7세는 언어나 인지뿐 아니라 신체, 사회성 등 모든 측면의 전인적 발달이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지나치게 긴 학습 시간과 압박감은 아이의 정신 건강을 해친다. 잘 견디는 듯 보이는 아이들 중에서도 눈 깜박임과 같은 틱 증상, 손톱 물어뜯기, 잦은 분노 표현 등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 아동심리상담센터 관계자는 “6세 여자아이가 스스로 머리카락을 가위로 자르는 이상행동을 보여 상담을 받은 적도 있다”며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 친구를 멀리하는 등 정상적인 교우관계를 만들지 못하는 유아들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영유 성공담’에 가려져 아이들이 잃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천근아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는 “정서적 안정감이 중요한 유아기에 주입식 교육을 하게 되면 커서도 감정 조절이나 스트레스 관리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며 “뇌 발달의 균형이 무너져 조그마한 좌절도 견디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첫 학습 경험이 짜인 계획에 따라 시키는 대로 끌려 다니는 형태가 되면 자기주도식 학습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길영 한국외국어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언어는 흥미가 중요하다”며 “초등학교 입학 후 영어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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