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아부터 사교육 굴레〈2〉 사교육 출발 ‘영어유치원’
3세부터 입학용 레벨테스트 준비
‘영유’ 들어가면 진도-숙제에 허덕
보충학원 또 다녀… ‘3중 사교육’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 A 군(5)은 지난해 유명 ‘영어유치원’(영유)의 입학 ‘레테’(레벨테스트)를 치렀다. 엄마들 사이에서 최근 ‘4세 고시’라고 불리는 시험이다. 알파벳 대소문자 읽고 쓰기, 간단한 영어 회화 등이 출제되는데, 떨어지면 3∼6개월 뒤 ‘재시험’을 봐서 합격해야 이 ‘영유’에 입학할 수 있다. 세 살 때부터 다른 ‘영유’에서 공부해 온 A 군은 레테에 합격했다. 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난관이 기다렸다.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들과 너무 빠른 진도. 학원장은 A 군의 어머니에게 “보충 학습을 따로 시켜 달라”고 대놓고 권유했다. A 군의 어머니는 그길로 인근 보습학원에 등록했다.
동아일보는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교육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걱세)’과 함께 초1 자녀를 둔 학부모 1만1000명을 대상으로 5월 16∼29일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 중 628명(6%)이 “자녀를 취학 전 영유에 보냈다”고 답했다. ‘일찍 배워두면 도움이 될 거 같아서’(510명), ‘선행학습 차원에서’(142명),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116명) 등의 이유가 많았다.
‘의대 광풍’이 최근 사교육의 종착지라면 ‘영유’는 그 출발지로 통한다. 일부 영유아는 네 살 때부터 40∼50분 수업에 10만 원이 넘는 ‘영유 입학’ 과외를 받거나 프렙(Prep·준비) 학원에 다닌다. 입학 후에는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 또 다른 보습학원을 오간다. 영유도 사교육이기 때문에 어린이 입장에서는 ‘3중 사교육’을 받는 셈이다. 교육부와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올해 전국 영유는 총 847곳이나 된다. 이 중 551곳(65.1%)이 서울, 경기, 인천에 집중됐고, 서울 강남 4구(강남, 서초, 송파, 강동구)에 114곳이 있다.
양신영 사걱세 정책대안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영유 과열은 입시와도 연결된다”고 지적했다. 유아 사교육을 다룬 책 ‘압구정에는 다 계획이 있다’를 펴낸 초등교사 임여정 씨는 “초교 저학년 때 영어를 끝내놓고 고학년부터는 수학, 과학에 몰두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퍼져 있다”고 지적했다. 네 살 자녀를 둔 학부모 B 씨는 ‘4세 고시’를 준비하려다 포기했다. B 씨는 “아직 손가락에 힘도 없는 아이에게 알파벳 쓰기를 시키는 내 모습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세살배기가 점심시간 쪼개 ‘영유 입학’ 사교육… 대입처럼 재수도
사교육 출발 ‘영어유치원’ 영어실력 일정 수준 넘어야 합격 떨어지면 3~6개월뒤 재시험 봐야 입학뒤 진도 못 따라가면 ‘유급’… “3세부터 사교육 경쟁 내몰려”
최근 서울 강남 등 일부 학원가에서 성행 중인 영어유치원은 대부분 ‘학습식’이다. 유치원 졸업 전까지 미국 초교 고학년 수준의 영어 읽기, 말하기 등 능력을 갖추는 것이 목표다. 4세에 입학한 후 3년간 빠른 속도로 진도를 빼야 하기에 입학 자격부터 까다롭다. 특정 교육기관이 실시하는 영재 테스트의 ‘상위 5% 영재’ 성적표를 요구하거나 5세 반에 ‘유급 제도’를 도입하는 등 ‘갑질’에 가까운 행태도 보인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학부모는 “학원이 아이들을 골라 받는다. 3세짜리 아기를 의자에 앉혀놓고 5∼10분간 하는 검사로 영재 여부를 판단한다”고 말했다.
● 4세 때 ‘레벨테스트’ 사교육
학원 자체 레벨테스트도 거쳐야 한다. 알파벳 쓰기나 철자와 발음을 이해할 수 있는지 등을 본다. 영어를 한 번도 접해 보지 않았거나, 단순히 알고 있는 수준으로는 레벨테스트를 치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4세 고시’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프렙(Prep·준비) 학원’은 원래 대치동의 ‘빅3’, ‘빅5’로 불리는 초등 유명 영어학원의 레벨테스트를 준비시켜 주는 곳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어유치원 입시도 준비시켜 주고, 숙제와 학원 진도를 따라잡는 보충 학습도 해주는 사교육 기관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입시 경쟁의 출발선이 7세에서 4세로 3년 더 앞당겨진 셈이다. 양신영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010년대부터 있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레벨테스트 준비가 더 격화되면서 프렙 학원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영유 입학’ 과외도 성행한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학부모는 “3세 영유에서는 소위 ‘네임드(유명한)’ 강사한테 과외를 받으려고 아기 점심시간까지 쪼개 과외를 다녀온다”고 귀띔했다. 본보가 실시한 초1 자녀 학부모 대상 설문에서도 자녀가 취학 전 영유(반일제 유아 대상 영어학원)를 다닌 적 있다고 응답한 628명 중 206명이 5세에 영어유치원을 시작했다고 답했다. 4세라는 응답자도 150명이었다. 절반 이상이 4, 5세에 영어유치원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 정부 칼 빼 들었지만… 영유들 ‘마이웨이’
정부는 지난달 26일 과열된 영어유치원을 정상화하겠다며 칼을 빼 들었다. 교습 과목을 영어로 신고한 뒤 수학 미술 등을 가르치고 교습비를 부풀리며 ‘유치원’ 행세를 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현행법에 따르면 영어유치원은 유치원이 아니라 학원이다. ‘영어유치원’에는 학원법이 적용되고, 유치원에는 유아교육법이 적용된다. 하지만 영어 외 수학 과학 등 다른 과목을 가르치고 점심 식사도 제공하면서 마치 유치원처럼 운영하고 있다.
정부 대책 발표 이후인 5일에도 기자가 돌아본 서울 강남구, 송파구 일대 영어유치원 10곳 이상이 기존 ‘유치원식’ 커리큘럼을 그대로 안내하고 있었다. 기본 월 교습비는 약 180만∼200만 원에 방과후학습, 교재 등 추가 비용을 받았다.
신체, 사회성, 정서 등 전인적 발달이 필요한 시기에 영어유치원의 학습 방식이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1990년대 초반 영어유치원이 생기기 시작할 때는 놀이식이나 절충식(놀이, 학습) 영어유치원이 많았다. 그러나 학부모들이 ‘가성비’(투자 비용 대비 학습 효과)를 요구하면서 최근에는 대부분 ‘학습식’으로 바뀌는 추세다. 아동학 박사인 권윤정 맘모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 원장은 “구조화된 환경에 지나치게 일찍 노출된 탓에 학습에 흥미를 잃고 부모와의 갈등이 생겨 상담센터를 찾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영어유치원이 앞으로 엄격한 유아교육법 적용을 받도록 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설립 인가를 받지 않고 학생을 모집해 유치원 형태로 운영할 경우 행정처분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공교육 강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송파구는 올해부터 관내 국공립 및 사립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원어민 영어교실’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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