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생의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고등학교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가서 1년 정도 산 경험이 있다. 2000년이었으니 지금처럼 외국 1년살이나 여행이 흔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그래도 가기 전 미국에 대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접한 미국 생활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한국과 달랐다.
● 충격·공포…그렇지만 수업다웠던 美 고교 수업
특히 가장 생경했던 것은 ‘읽고 토론하는’ 학교 수업 문화였다. 지금은 그리 신기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당시 기자에겐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였다. 영어(거기서는 국어) 시간에는 늘 그날 배울 소설이나 글을 읽고 와야 했다. 읽어온 내용으로 선생님, 교우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지리나 역사 같은 사회 교과 시간에는 조를 나눠 토론하기 일쑤였다. ‘수학은 좀 낫겠지’하고 기대했지만 오산이었다. 수학 수업도 발표의 연속이었다. 한국 학생들의 수학 진도가 월등히 빠른 탓에 본의 아니게 ‘수학 우등생’이 된 기자는 거의 매 수업마다 칠판 앞으로 불려 나가 “식을 그리고 설명해 달라”는 선생님의 주문을 소화해야 했다.
처음 한두 달은 ‘오늘도 발표시키면 어떡하나,’ ‘토론 내 차례가 되면 뭐라 이야기하지’ 하는 걱정에 긴장해 수업 시간을 앞두고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한국처럼 고개 숙이고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 활동과 발표가 일상적인 수업 특성상 내내 고개 숙이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기자가 적응해야 했다. ‘입시지옥’도 뚫는다는 불굴의 한국 고등학생 아닌가. 수험생 자세로 특훈에 돌입했다. 수업에 앞서 소설책을 두세 번씩 읽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단기간 그렇게 많은 영어책을 읽은 적은 없을 것이다. 토론 수업에 앞서서는 상대방이 낼 의견까지 미리 생각해 마치 연극 연습하듯 대사를 짜고 외웠다. 다행히 당시 미국엔 학원, 과외도 없어서 방과 후 자습할 시간이 많았다.
그렇게 몇 달 하자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말문이 조금 트이고 나서 보니 토론이란 게 별 게 아니었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내게 무슨 대단한 고견을 기대하는 게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한다는 게 다를 뿐 토론은 그냥 대화의 연장선상 같은 것이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남의 생각을 듣고, 거기에 내 생각을 첨언하고.
미국식 교육이 꼭 더 낫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기해 보면 적어도 그곳에서의 수업은 정말 ‘수업을 위한 수업, 수업 같은 수업’이었다. 프란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배우는 시간에는 정말 소설을 읽고 와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회 과목 시간에는 주로 찬반 토론을 했는데, 토론을 하려면 예습이 필수이다 보니 자연히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 시간에 딴 짓을 한다거나 다른 공부를 꺼내놓고 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 대입 중심 한국 교육, 변화 시도 있었지만…
갑자기 20여 년 전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최근 수능을 위시한 교육 개혁을 보면서 그때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국과 달리 한국의 수업은 ‘대학입시를 위한, 대입에 의한, 대입용’ 수업이었다. 한국 고등학교에서 소설을 배운다고 하면 그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이 소설 문제가 어떻게 출제되는지’를 배우는 걸 뜻했다. 사회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정부는 수능에 올인하는 고교 교육을 정상화한다며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는 무시험 대학 전형’을 도입한다고 했다. 야간자율학습(야자)이 강제에서 자율로 바꾸고 아이들 수능 줄 세우기를 부채질하는 모의고사도 없앴다. 기자가 미국에 가기 전 이런 정책이 발표되었는데, 돌아와 보니 정말 야자가 자율로 바뀌고 모의고사도 사라져있었다. 이 정책의 대상이 된 학생들을 당시 교육부 장관 이름을 붙여 ‘이해찬 세대’라 부르는데 기자도 바로 그 이해찬 세대 중 한 명이다.
미국에서 야자도, 모의고사도 없고 SAT(미국 대입 자격시험)에 목매지 않아도 되는 학교생활을 경험해보았기에 정부의 개혁 방향에 큰 이견은 없었다. 하지만 학교에 복귀하고 나서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 십수 년간 특기를 키울 기회 없이 자란 한국 학생들은 대입에 들이밀 특기가 없었다. 단 1, 2년 남은 입시까지 믿을 건 내신과 성적 관련한 수상 기록뿐이었다. 결국 절대다수의 학생들이 다시 학교 시험과 수능 준비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자율로 바뀐 야자엔 학원을 갈 여력이 없는 친구나 소위 ‘날라리’라고 하는 친구들만 남았다. 스스로 공부해 본 경험이 없는 대다수 친구들은 학원으로 달려갔다.
당시 개혁의 결과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수능 난이도 조절 실패에 따라 학생들 점수가 폭락하면서 이해찬 세대들에게는 ‘단군 이래 최저 학력’이라는 오명만 남았다.
그때 정부의 개혁이 잘못된 것이냐 묻는다면 꼭 그렇게 생각진 않는다. 개혁의 취지는 대입 준비기관으로 전락한 학교를 정상화하고, ‘시험 기계’ 아이들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키우자는 것이었다. 분명 성과는 있었다. 이후 대입 방식이 다변화했고, 학교에서도 다양한 교육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다.
하지만 20년 이상 지난 지금 다시 수능 개혁이 이슈가 되는 걸 보면 교육 현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과거 중·고등학교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의대 진학반을 이제는 초등학교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영유아들조차 교과 사교육에 내몰린다.
● ‘정말 도움이 되는 공부일까’ 부모들도 자문해봐야
대학이란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무작정 달려온 아이들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실질적인 진로 고민을 시작한다. 이미 중·고교 때부터 직업 교육을 받고 대학 졸업 전 취업할 곳이 정해진다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노동시장 진입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한 기획 기사를 준비하면서 20대 청년 여러 명을 취재한 적이 있는데 “대학을 점수 맞춰 선택했다”거나 “전공과 관계없이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취업을 위해 대학 졸업 후 전혀 새로운 분야를 다시 공부하고 있다”는 청년들이 정말 많았다. 20년 전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얼마 전 기사에서 한 명문대 교수가 “내가 기업인이라면 한국 대학생들은 뽑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 걸 봤다. 명문대 입시에 목을 매는 한국 학생들을 보면 전문성도 없고 그저 좋은 회사에 취업하고 싶을 뿐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자기 의견도 없기 때문이란다. 학창시절 스스로 공부하고 탐색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노동시장은 급변했는데, 우리의 교육은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큰 틀의 개혁은 정부가 이끌어가야겠지만, 부모들도 자문해봤으면 좋겠다. ‘과연 이것이 정말 아이 미래에 도움이 되는 공부인가?’
기자는 아이들이 소설에 대해 겉핥기 지식만 배우는 게 아니라 실제 책을 많이 읽고, 사회 문제를 그저 외우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며 문제를 자연스레 익히는 그런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갈수록 노동시장에서도 그런 인재가 필요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왜 20년 넘게 제자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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