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 분리 정책)’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1994년 넬슨 만델라(1918∼2013·사진)에 의해 전면 폐지될 때까지 법으로 공식화되어 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유색인종 차별 정책이었습니다.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고, 흑인과 백인 거주 지역은 철저하게 분리했습니다. 임금 역시 백인들에 비해 흑인들은 형편없었습니다.
1942년 요하네스버그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만델라는 1943년부터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서 활동하며 투쟁을 시작합니다. 만델라와 ANC는 처음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받아들여 평화적 투쟁 방식을 택했지만 점점 심해지는 인종 차별 정책과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까지 가하는 상황에서 무장투쟁을 결심합니다. 당시 남아공의 백인 정권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인종 차별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었습니다. 1956년에는 인종별 분리투표 법안까지 통과시켜 일부 주에서는 유색인종과 흑인의 일반적 투표권마저 박탈했습니다.
만델라는 남아공 정부를 상대로 파업과 테러를 벌이다 결국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만델라의 수감 생활은 지독했습니다. 석회 채석장에서의 고된 노동으로 백내장에 시달렸습니다. 장기간의 수감생활로 어머니와 아들이 죽었을 때 장례식에도 못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토록 가혹한 상황에서도 남아공 대통령들에게 편지를 쓰고, 동료 죄수들을 교육하고, 교도소 환경 개선을 위해 단식투쟁을 합니다. 외부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고, 한편으로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만델라는 국제사회에 남아공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습니다. 국제사회는 비로소 남아공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남아공의 흑인들과 해외 재야인사들은 줄기차게 그의 석방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1988년 영국 런던에서는 에릭 클랩턴, 스티비 원더 같은 유명 음악인 83명이 그의 70세 생일 기념 콘서트를 열고 석방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1990년 데클레르크 정부는 만델라를 석방합니다. 만 26년 만이었습니다.
그해 7월 ANC 의장으로 취임한 만델라는 데클레르크 총리와 함께 인종 차별을 끝낼 민주헌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리고 1993년 그 둘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합니다. 이듬해 남아공 최초로 실시된 총선거에서 만델라는 세계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남아공 제8대 대통령이 됩니다. 그의 정부에서 만든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일어난 국가폭력 사례를 조사해 과거사 청산을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용서하되 잊진 않는다”라는 슬로건 아래 모두 사면함으로써, 남아공의 안정과 화합,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투사 만델라에서 남아공의 진정한 리더가 된 겁니다.
유엔은 남아공 인권운동에 큰 획을 그은 만델라를 기억하기 위해 그의 생일을 ‘국제 넬슨 만델라의 날’로 제정했습니다. 바로 이달 18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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