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에게 물어보니 학급 운영이 작년보다 10배 더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수업 시간에 ‘선생님 때문이야’라고 소리 지르는 학생이 있다면서 ‘출근할 때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고 했어요.”
18일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여교사 A 씨(25)가 극단적 선택을 한 채로 발견된 사건과 관련해 ‘생전 고인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취지의 동료 교사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21일 서울교사노동조합이 공개한 증언에 따르면 이 학교에 근무했거나, 근무 경험이 있는 교사들은 고인이 일부 학부모의 지속적인 민원에 시달렸다고 전했다.
동료 교사 B 씨는 “A 씨가 학부모로부터 개인 휴대전화로 전화 수십 통을 받았다고 했다. ‘교무실에도 이 번호는 알려준 적 없는데 소름끼친다. 방학 후에 휴대전화를 바꿔야겠다’고 했다”고 노조에 밝혔다. 이 교사에 따르면 최근 A 씨 학급에서 한 학생이 연필로 뒷자리에 앉은 학생의 이마를 긋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된 가해자 또는 피해자 학부모가 ‘전화 폭탄’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다른 동료 교사 C 씨는 “연필로 이마를 그은 사건과 관련해 한 학부모가 교무실로 찾아와 A 씨에게 ‘당신은 교사 자격이 없다’, ‘애들 케어(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항의했다”고 전했다. 해당 지역 학부모들이 모인 맘카페에서도 “고인이 맡은 반에 악성 민원을 일삼는 학부모가 있었다”는 글이 이어지고 있다.
A 씨가 다녔던 학교에 극성 학부모들이 많았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수년 전 이 초교에서 학교폭력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는 한 교사는 “민원 수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며 “한 학부모로부터 ‘나 뭐 하는 사람인지 알지? 변호사야’라는 말도 들은 적 있다”고 노조 측에 밝혔다. 몇 년 전 이곳에서 교육봉사를 했다는 한 현직 교사도 “아이들이 학원 버스에 제대로 탑승했는지 학부모들이 일일이 확인한다. 교사들이 운동장부터 교문까지 같이 가주지 않으면 ‘민원 폭탄’이 들어온다”고 동아일보에 전했다.
한편 이번 사건와 관련해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21일 현장간담회에 참석해 “그동안 학교에서 학생의 인권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우선시되면서 교권은 땅에 떨어지고 교실 현장은 붕괴되고 있다”며 “학생인권조례를 재정비하겠다”고 밝혔다. 2010년 처음 제정돼 6개 시도에서 시행 중인 학생인권조례를 교육부가 직접 손보겠다는 방침을 밝힌 건 처음이다.
21일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검은 마스크를 쓰고 검은 옷을 입은 동료 교사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학교 담벼락은 전국 교사들이 보낸 화환 약 1500개로 둘러쌓였다. 2년차에 스스로 세상을 떠난 교사 A 씨의 명복을 비는 이들은 담벼락 곳곳에 추모 메시지를 담은 포스트잇 수천 개를 붙였다.
강남구 강남서초교육지원청에 마련된 공식 분향소에도 조문객과 화환이 밀려들었다. 강남구 분향소에서 만난 김세원 씨(23)는 “올 9월 발령을 앞둔 예비 초등학교 교사인데 먼저 발령받은 동료들로부터 교권 침해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며 “내 미래를 보는 것 같아 펑펑 울다 조문하러 왔다”고 말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에 마련된 추모 게시판에는 이틀 동안 1000명이 넘는 동료 교사들의 추모글이 올라왔다.
● 신규 임용 교사들의 무덤
A 씨가 다녔던 초교에서 근무했던 전현직 교사들은 이 학교가 학부모들의 민원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으며 ‘신규 임용 교사들의 무덤’이라고까지 불렸다고 증언했다.
동료 교사 D 씨는 “경력이 많지 않은 교사들이 일하기 매우 힘든 학교였다. 후배 교사가 울면서 찾아와 위로해 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다른 동료 교사 E 씨는 “A 씨의 학급에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학생이 있어 고인이 매우 힘들어 했다”고 노조 측에 전했다.
A 씨의 지인은 동아일보 기자에게 “아이들 하나만 생각하면서 살았다. 지난 주 (숨진 A 씨를) 만난 친구가 ‘평소처럼 밝았다’고 해서 갑작스런 사망 소식에 황망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본인을 A 씨의 사촌오빠라고 밝힌 누리꾼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A 씨의) 일기장에 ‘너무 힘들고 괴롭다’는 글과 함께 갑질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A 씨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A 씨의 지인들은 “집이 아니라 자신이 일하던 학교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며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경찰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교장과 교감을 포함한 해당 초교 교사 60여 명 전원을 상대로 참고인 조사를 벌일 계획이다. 교육부는 경찰 조사와 별개로 서울시교육청과 합동조사단을 꾸려 해당 교의 학부모 갑질 여부 등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로 했다.
● 교사 87% “1년 내 이직·사직 고민”
A 씨가 다녔던 초교 뿐 아니라 서초구 및 강남구 일대의 학교는 높은 학구열과 극성 학부모들의 민원으로 교사들 사이에서 기피 대상이 되고 있다.
서울지역 초등학교 교사 전·출입 현황을 보면 지난해 서초·강남구에서 다른 자치구로 옮긴 교사는 346명인 반면 반대의 경우는 298명으로 전출 간 교사보다 전입 온 교사가 48명 적었다. 이에 서울시교육청은 올 3월 강남서초교육지원청에 한해 ‘5년 이상 근무(1개 학교 이상 근무) 후 전출’ 규정을 ‘10년 이상(2개 학교 이상 근무)’으로 변경하는 행정예고까지 했다. 교사 단체는 A 씨의 사망이 학생 인권을 강조하다 교권 침해가 발생해 생긴 일이란 입장이다. 정성국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장도 “학생 인권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비통한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했다.
교사노동조합연맹이 올 5월 발표한 ‘교육현장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교권 침해로 정신과 치료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교사는 26.6%였다. 또 ‘최근 1년간 이직 또는 사직을 고민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교사는 87%였다. 이중에서 ‘거의 매일’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5%에 달했다.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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