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무 중 감전사고 양팔 잃어
전자의수 끼고 사이클에 도전
딸의 얼굴 왼쪽가슴에 새긴채
국가대표 향해 재기의 레이싱
“그날 사이클 트랙에 들어서는데 컨디션이 최고였어요. ‘이래도 나를 국대(국가대표)로 안 뽑아?’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죠. 신기록을 낼 거 같아서 경기 전에 주최 측에도 얘기해놨어요. 원래 뒤에서 출발한 선수가 앞 선수를 따라잡으면 시합이 도중에 끝나는데 제가 앞 선수 따라잡더라도 흐름을 끊지 말아달라고요.”
지난해 10월 전국체전 사이클 경기가 열린 강원 양양 벨로드롬에 장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이번 경기는 추월 승부가 아니고 기록경기입니다. 심판진은 경기 중단 없이 끝까지 진행해주세요.’
장애인 사이클 국가대표 상비군인 나형윤 선수(39)는 이날 자신감에 부풀어있었다. 출발선에 선 형윤은 한바퀴가 333m인 달걀형 트랙을 찬찬히 살폈다. 승부를 겨룰 다른 선수는 반 바퀴 앞인 맞은편에서 출발대기 중이었다. 이 트랙을 12바퀴(총 4km) 도는 경기였다. 형윤은 몇 주 전 비공식 4km 경기에서 기존 신기록을 훌쩍 넘겼다. 국가대표 선발전인 이번 체전에서 그때처럼만 달려준다면 태극마크를 달 수 있었다.
형윤은 출발선 옆 관중석으로 고개를 돌려 두 사람과 눈을 맞췄다. 딸 하나린(8)과 부인 박미선(39) 씨였다. 하나린은 ‘하늘에서 내려온 아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딸아이는 이날 아침에도 평소처럼 형윤에게 ‘로봇팔’을 건네며 “아빠, 오늘도 일등 해”라고 말했다. 두 팔이 없는 형윤은 딸이 로봇팔이라고 부르는 전자의수를 착용하고 사이클을 탄다. 팔뚝 절단 부위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의수의 손을 오므렸다 폈다 할 수 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린, 아빠 팔 좀 갖다 줘’ 이렇게 말하곤 해요. 경기 있는 날 아침엔 드라이기나 손 선풍기로 의수를 꼼꼼히 말려요. 의수와 피부 접촉면에 땀이 차면 오작동이 날 수 있어서요.”
국가대표 선발전 그날
출발 신호가 울리자 형윤은 ‘댄싱’을 시작했다. 안장에서 엉덩이를 뗀 채 사이클을 좌우로 흔들며 매섭게 치고 나갔다. 사이클 선수들은 속도를 빠르게 끌어올리기 위해 핸들 손잡이를 몸 쪽으로 잡아당기며 춤을 추듯 좌우로 무게중심을 옮긴다. 이 때 페달을 힘껏 구르면서 동시에 핸들을 강하게 잡아당길수록 속도가 빨리 붙는다. 형윤에겐 전자의수가 빠지지 않도록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순간이다. 이 때만 해도 경기는 순조로운 듯 했다.
댄싱으로 반 바퀴쯤 달려 속도가 붙자 형윤은 안장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사이클 바퀴에서 나는 ‘쐐’ ‘쐐’ 소리가 고요해진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이제 형윤은 핸들 손잡이에서 손을 떼서 핸들 가운데 세로로 뻗어있는 티티바(TT바·Time Trial Bar)로 옮겨 잡을 타이밍이었다. 티티바를 잡아야 몸이 공처럼 모아져 공기 저항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
“왼손부터 티티바로 옮겨 잡으려고 하는데 핸들을 쥔 손이 펴지지가 않는 거예요. 손이 그 상태로 잠겨버린 거죠. 댄싱할 때 팔을 살살 당긴다고 당겼는데 힘이 들어갔는지 의수가 살짝 들려서 배터리 접촉 불량이 된 거 같더라고요. 급한 마음에 배터리가 단자와 잘 맞붙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오른팔을 핸들에서 떼서 왼팔을 막 때렸어요. 근데 왼손이 움직이기는커녕, 오른손마저 충격 때문에 오류가 나서 손이 벌려진 채로 말을 듣지 않더라고요.”
응원석에 있던 미선은 비틀비틀 트랙을 달리는 남편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봤다. 승부욕이 강한 형윤에게 미선은 “욕심 내지 말고 다치지 말자”는 말을 자주 해왔다. 미선에게 남편의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를 들려왔다.
“손이 망가졌어! 손이 안돼!”
형윤은 오른손이 공중에 들린 채로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사력을 다해 페달을 구르고 있었다. 사이클 전용 경기장인 밸로드롬은 트랙 양끝에 있는 반원 모양 곡선주로의 경사가 40도 정도로 가파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선수들이 트랙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형윤은 파도 꼭대기에 선 서퍼처럼 아슬아슬하게 곡선주로를 달렸다.
몸이 부서지고 난 뒤
형윤이 두 팔을 잃던 날 저녁은 강풍이 불었다. 그가 강원도 최전방인 22사단 GOP 부대 중사로 근무하던 2006년 11월이었다. 강풍에 고압선이 끊어져 북쪽을 비추는 철책 경계등이 모두 꺼져버렸다. 야간에 북한군의 동태를 살피기 어렵게 된 비상사태였다. 상급부대에서 전기 기술자를 급파했다. 그 기술자는 바람이 계속 불어 위험하다며 복구 작업을 포기했다.
그러자 부대장은 형윤에게 작업을 청했다. 형윤은 부대 간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봇대에 올랐다. 하지만 몇 시간 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고압전기가 양팔과 겨드랑이, 허벅지 등을 관통해 몸 곳곳이 터져나간 상태였다. 8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두 팔은 절단해야 했다. 이듬해 전역할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세 살이었다.
형윤은 중고교 동창이자 동갑인 미선이 처음 문병을 왔던 날 짓궂게 인사를 건넸다. “야 이 기집애야, 오빠가 다쳤는데 이제야 오냐.” 미선은 응수했다. “여자 동창들 중에 나 혼자 왔거든. 고마운 줄이나 알아.”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5년간의 연애 후 2014년 결혼했다. 결혼식 날 형윤은 실리콘으로 된 의수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었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을 지켜봐온 하객들은 저마다 눈물을 쏟았지만 신랑 신부는 예식 내내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이듬해 딸이 태어날 때만해도 형윤은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팔을 잃은 청년 장애인이 생계를 위해 마련한 나름의 대안이었지만 결국 처분했다. “아이에게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아빠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서 복지시설에 취업했어요.”
형윤은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태권도와 철인3종을 하는 장애인들을 알게 됐고 그들의 권유로 운동을 시작했다. 금세 소질을 보인 형윤은 철인3종 가운데 하나인 사이클 선수가 됐다. 그는 “제가 (사이클을) 잘은 못 타도, 할 수 있는 거라서 도전하게 됐다”고 했다.
전자 의수를 착용하면 자전거를 타는 게 가능했다. 브레이크는 안장 바로 밑 프레임에 옮겨 달아 허벅지를 오므리면 잡을 수 있게 개조했다. 또 고개만 숙이면 물을 마실 있도록 긴 투명 빨대를 물통에서 핸들 앞까지 연결했다. 포스코1%나눔재단 등에서 지원받은 보조기구들도 ‘빈틈’을 메워줬다. 형윤은 마음이 답답한 날이면 친구들과 집이 있는 가평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로 다녀오기도 했다. 자전거는 장애를 갖게 된 뒤 움츠려드는 형윤이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준 친구였다.
장애인 사이클은 장애 정도에 따라 5등급으로 나뉘고 1등급에 가까울수록 중증인데 형윤은 4등급으로 분류됐다. 등급에 따라 가중치를 적용하기 때문에 경증인 선수가 중증 선수보다 순위가 높으려면 기록이 월등히 좋아야 한다. 형윤은 지난 4년 간 한 단계씩 올라서며 국가대표 상비군이 됐다.
장애인이 운동선수를 직업으로 유지하려면 국가대표가 돼야 한다는 게 형윤의 생각이었다. 그래야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있고 거기서 포인트를 쌓아야 패럴림픽에도 나가며 후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부서지고 난 뒤 비로소 시작한 사이클은 그에게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 수 있게 해줬다.
멘탈이 터지고 딸의 목소리만
짧은 시간 동안 폭발적인 스피드로 승부하는 사이클 트랙 경기에선 몸을 최대한 낮춰 공기저항을 줄여야 한다. 한손으로 핸들을 잡고 달리던 형윤은 균형을 잡으려 몸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페달을 굴러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이번 경기를 통해 국가대표가 되고자 했던 형윤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 오작동이 와버리니까 멘탈이 터져버렸어요. 코치는 ‘그냥 달려!’ 이러는데 저는 그냥 멘탈이 나가버리더라고요.”
관중석에 있던 8살 딸이 미선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 오늘 왜 그래?”
“아빠가 손이 고장 나서 넘어질지도 몰라. 하나린이 아빠 잘 타라고 응원해줄래.”
네 살 때부터 아빠 경기를 따라다녔던 딸은 형윤이 질주할 때면 자그마한 몸으로 경기장이 떠나가도록 응원했다. 꼬마의 우렁찬 목소리에 다른 관중들도 박수를 치며 추임새를 넣는 일이 많았다.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수줍음을 느끼게 됐는지 응원소리가 작아졌지만 이날만큼은 예전처럼 온 힘을 다했다. ‘쐐~’ ‘쐐~’ 소리만 나던 경기장에 여리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빠 아빠!”, “아빠 파이팅!”, “아빠 이겨라!”
시합을 계속해야 할지, 포기할지 정신이 혼미했던 형윤은 이 소리를 바로 알아챘다.
“딱 그 소리밖에 안 들렸어요. 아이가 꼬맹이 때처럼 목이 터져라 외치는….”
형윤은 다시 세차게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오래 달리지는 못했다. 딸아이의 눈앞에서 상대 선수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 이기는 건 당연하고 신기록을 목표로 시합에 나섰던 형윤은 추월 패를 당해 트랙에서 내려왔다. 의기소침해진 그는 경기 후 양양 앞바다에서 돌 틈에 숨은 꽃게를 같이 잡자는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고배를 마신 형윤은 “그래도 로봇팔이 있어서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의수는 제 몸의 일부인데 어떻게 원망하겠어요. 더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제 잘못이죠.”
결혼 전에 형윤은 의수를 밖으로 내놓고 반팔 차림으로 외출하곤 했지만 딸이 태어난 뒤부턴 여름에도 밖에 나갈 땐 긴팔을 입는다. 의수를 낀 아빠 때문에 아이가 불편한 시선을 받을까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형윤은 딸의 학교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 나누던 대화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한 친구가 “애들이 교실에서 ‘하나린 아빠는 장애인’이라면서 웃고 떠든 적이 있다”고 하자 딸이 “나 그 때 교실에 없었는데…”라며 말을 흘렸다. 그러자 친구는 “너 그때 교실에 있었잖아”라며 천진하게 말했다. 형윤은 딸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말없이 바라봤다.
딸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친구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빠 장애인인데 그게 뭐가 어때서. 우리 아빠, 나라 지키다가 다친 거야. 장애인이 창피한 거 아냐.”
몇 주 뒤 미선은 딸 담임교사와 면담하며 이 일화를 꺼냈다. 교사는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다”고 미선을 안심시켰다. “하나린이 반 아이들에게 ‘우리 아빠 팔은 로봇팔이야. 군대에서 다쳐가지고 국가유공자이고 사이클 선수야’라고 자랑하듯 얘기하더라고요.”
엄마는 똥손, 아빠는 금손
미선이 출산 이후 혼자 외출을 해본 건 딸이 태어난 지 952일만이었다. ‘독박육아’를 각오하긴 했지만 팔이 자유롭지 않은 남편의 빈자리는 컸다.
“처음으로 혼자 외출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할 정도로 독박육아를 했어요. 제가 육체적으로 힘들었다면 신랑은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거예요. 눈앞의 아기를 얼마나 안아보고 싶었겠어요. 다른 아빠들처럼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싶었을 거예요. 다행히 아이가 몸을 가눌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신랑이 기저귀를 갈았어요. 사회복지사로 일할 때 어르신들 기저귀 갈아드리는 일을 한 적이 있어서 맨손으로 곧잘 하더라고요.”
딸을 맘껏 안아주기 어려운 형윤은 배낭처럼 메는 캐리어에 아이를 태우고 틈만 나면 나들이를 다녔다. “신랑은 몇 시간이고 아이를 어깨에 메고 산에 가고 바다도 가고 전국을 다녔어요. 물고기도 같이 잡고, 스키도 같이 타고, 부루마블 게임도 하고…. 요즘은 신랑이 아침에 누룽지 끓여서 아이 밥 먹이고 등교까지 시켜서 저는 많이 편해졌어요. 다른 어떤 아빠들보다 아이와 많은 걸 함께 해요. 하나린은 아빠의 장애를 느낄 겨를이 없을 거예요.”
형윤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딸의 그림 친구이기도 하다. 의수에 연필을 끼워 쓱쓱 그려낸다. “신랑이 옛날에 학교 다닐 때부터 판화 같은 걸 엄청 잘 했었거든요. 나비 한 마리를 그려도 저는 유치원생처럼 그리는데 신랑은 호랑나비도 거의 똑같이 그려줘요. 그래서 하나린이 저한테 만날 그러죠. 엄마는 똥손이고 아빠는 금손이야.”
금메달도 메우지 못한 빈자리
형윤은 지난해 4월 네델란드에서 열린 세계 상이군인 체육대회인 ‘인빅터스 게임’에 출전해 남자 사이클 부문(개인독주 로드바이크1)에서 우승했다. 세계 각국 상이군인 출신 선수들이 모이는 이 대회에선 메달 수여식이 독특했다. 금·은·동 메달리스트가 높이 차가 없는 연단에 나란히 서고, 자녀나 배우자 등 가족이 선수에게 메달을 걸어줬다. 한 여자선수에겐 남자친구가 메달을 걸어준 뒤 무릎을 꿇고 청혼하기도 했다. 형윤은 딸아이 또래의 여자아이가 휠체어에 탄 아버지에게 메달을 걸어주며 목을 끌어안는 장면을 가만히 바라봤다.
“가족들 동행은 지원이 안 된다고 해서 저 혼자 오긴 했는데 딸과 아내가 함께 왔더라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한국에선 상이군인이라고 자부심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여기 선수들과 가족들은 정말 자랑스러워하더라고요. 제가 딸에게 아빠가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다쳤다고 얘길 해주긴 했지만 아이는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를 수 있잖아요. 금메달 딴 거 많이들 축하해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사실 남들 평가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내 가족이, 내 딸이….”
형윤은 말을 잠시 멈추고 촉촉하게 붉어진 눈동자를 깜박였다. 기자와 인터뷰할 때마다 개구쟁이 같은 눈빛으로 거침없이 말하던 평소와는 다른 눈동자였다.
그는 인빅터스 대회에 함께 출전한 동료 선수들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군 간부가 공무 중 부상으로 장애를 얻으면 상이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제대 후 15년이 지났지만 형윤은 늦게나마 상이연금을 받을 수 있는지 국방부에 문의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장애 발생 5년 내에 연금을 신청해야 한다는 규정 탓에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5년 시효’가 지났더라도 장애가 악화된 경우 신청이 가능했지만 형윤은 이미 가장 중증인 장애1급으로 전역해 해당될 수 없었다.
“제 권리에 무지했다는 것에 자책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전역 당시 상이연금에 대한 안내가 전혀 없었고, 5년 내 신청해야 한다고 하는데 23살에 양팔을 절단하고 어떻게 살지 막막하던 시기여서 다른 건 신경 쓸 여력이 없었어요.”
“아빠 가슴에 왜 내가 있어?”
올해 첫 전국 대회가 열린 5월 6일 전남 영암국제자동차경주장 선수 대기실은 ‘쐐’ 소리로 가득했다. 경기 시작 30분을 앞두고 몸 풀기가 한창이었다. 사이클 뒷바퀴를 거치대에 올려놓고 페달을 구르는 형윤의 허벅지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형윤은 핸들 위에 깔아놓은 흰 수건 위에 맨 팔뚝을 기댄 채 페달을 굴렀다.
조금 뒤 사이클에서 내려온 그는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아냈다. 이제 출발선으로 이동할 차례였다. 형윤은 젖은 훈련복을 벗고 맨 팔뚝으로 유니폼 상의를 꺼내들었다. 옷 아래쪽을 입으로 물고 능숙하게 한 팔 씩 소매에 집어넣는데 그의 가슴팍에 주먹만한 문신이 살짝 비쳤다. 딸의 앳된 얼굴이 왼쪽 가슴에 새겨져있었다.
“아빠 가슴에 왜 내가 있어?”라고 아이가 물을 때면 형윤은 “하나린이랑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고 싶어서”라고 말해준다.
유니폼 지퍼를 올린 그는 사이클 옆에 놓아둔 때 묻은 로봇 팔을 한 짝씩 꼈다. 이어 오른손으로 왼손을 한 번 툭, 왼손으로 오른손을 한 번 툭 쳤다. 그래야 두 팔에 전원이 켜진다. 형윤은 안장에 몸을 실으며 이제 한 몸이 된 두 손으로 사이클 핸들을 굳게 쥐었다. 그러곤 탁 트인 트랙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
<특별취재팀>
▽기획·취재: 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 ▽사진: 송은석 기자 ▽디자인: 김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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