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 때 교사 체벌로 왼쪽 눈 실명
피아노 배우며 ‘음악의 길’ 새 인생
오른쪽 시력도 악화 ‘전맹’ 대비 중
“동료들 응원이 큰 힘 포기 안 할 것”
“중2 때였어요. 당시 선생님이 쪽지시험을 보고 틀린 개수만큼 머리채를 잡고 칠판에 얼굴을 들이박았거든요. 저도 불려나가서 칠판에 여러 번 세게 부딪혔는데 갑자기….”
작곡가 임채섭 씨(41)는 과거 교사의 체벌로 왼쪽 눈을 실명했다. 권투선수들이 시합 중 눈을 정통으로 맞았을 때 종종 발생하는 망막 박리가 심하게 왔다. 채섭은 남은 한 쪽 눈에만 의지하다보니 오른쪽 시력도 서서히 악화됐다. 사고 후 27년이 지난 지금, 그는 진행성 시각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어제까지 보이던 게 오늘은 보이지 않고, 어제는 할 수 있었던 일이 오늘은 어려워지기도 한다.
그는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작곡 경력을 차곡차곡 쌓았다. 올해로 17년차다. 드라마 OST, K팝 등 다양한 작업에 참여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는 여러 번 음악을 단념하려 했다. 피로가 누적된 날은 잔존 시력이 거의 나오지 않아 악보조차 보이지 않았다. 건반에 닿는 손의 기억에 의존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만하면 해볼 만큼 해봤다’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놓지 않았다.
“어떻게든 음악을 계속 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보니 눈을 대신해 줄 기술과 장비들을 발견하고 익히게 되더라고요. 시력을 잃는 속도보다 기술에 적응하는 속도를 더 높이면 나중에 완전히 못 보게 되더라도 음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안내견과 전철역 가는 길
지난달 1일 아침 채섭이 함께 사는 시각장애인 안내견 ‘호연’이와 서울 도봉구 집을 나섰다. 지방 공연에 가는 날이다. 채섭이 인근 전철역인 창동역까지 가려면 횡단보도가 3군데를 건너야 한다. 세 곳 모두 신호등이 없어 건널 때 차가 오는지 잘 살펴야 한다.
“진행성 시각장애가 있다보니 횡단보도 건너는 게 갈수록 조심스러워져요. 호연이에게 50%는 의지하지만 저 역시 안내견의 안전을 지켜줘야 하니까 횡단보도 앞에 서서 귀를 최대한 기울입니다. 차 소리가 완전히 안 들리고 사람들 건너는 소리가 들리면 그 때 움직이죠.”
채섭이 호연이와 함께 지하철 플랫폼에 들어서자 마침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선로에 멈춰선 열차 문이 닫히기까진 4, 5초의 여유가 있었지만 채섭은 열차에 바로 타지 않고 탑승구 앞에 멈춰 섰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가 다음 열차가 도착하면 문이 열리자마자 타야 안전하거든요.”
호연이는 다음 열차가 올 때까지 수시로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눈동자로 ‘형아(채섭)’를 살폈다. ‘앉아’ ‘일어서’ 같은 구령을 듣기 위해 귀도 쫑긋 세웠다. 채섭과 호연이가 열차에 오르자 승객들의 시선이 이 래브라도 리트리버 안내견에게 온통 쏠렸다.
“호연이를 예쁘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 감사하긴 한데 눈으로만 봐주시면 좋겠어요. 가끔 말없이 사진을 찍거나, 제가 시각장애인인 걸 알고 제 얼굴 바로 앞에서 찍는 분도 있거든요. 만지시는 분들도 있고요. 근데 안내견이 낯선 자극을 계속 받게 되면 평소 훈련받은 역할을 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어요.”
장애인마다 ‘장애 MBTI’가 있다
채섭이 이런 일상을 갖게 되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교사의 폭력으로 시력을 잃고 집에서만 채섭은 방 유리창 너머로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와도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낙오자가 된 것처럼 너무 위축이 되고 중2병까지 겹쳐서 그랬던 거 같아요. 마음의 블랙홀이 쉽게 메워지진 않더라고요.”
그는 가해 교사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사춘기를 보냈다. 하지만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드라마 ‘더글로리’ 보셨나요. 복수를 하고나면 결국엔 허무해지지 않던가요. 저는 이미 너무 큰 것을 잃어버렸는데 남은 삶마저 미움과 분노로 채우면서 더 슬프게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눈 수술 후 중학교를 휴학한 채섭이 하루 일과를 보낸 곳은 동네 피아노학원이었다. 당시 좋아하던 게임을 할 수도 없었고 책을 읽기도 어려워, 대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 위치는 손끝으로 선명히 느껴졌고, 귀에 들려오는 소리로 악보를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피아노 학원이 그에겐 학교이자 놀이터였다.
“당시 라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하루하루 보내곤 했는데 음악이 마음속 빈 공간으로 들어오더라고요. 이 곡을 만들었던 사람과 소통하는 것 같아서 혼자 남겨진 기분도 덜 느껴지고, 나 역시 누군가를 위해 이런 걸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채섭의 할머니는 음악을 통해 세상으로 나오려는 손자에게 전자피아노를 마련해줬다. 할머니는 “너한테 가장 필요한 것을 사라”며 매달 몇 만원씩 십수 년간 모아온 쌈짓돈을 내준 것이었다. 채섭은 그 전자피아노로 독학을 해 부산대 음대에 입학했다.
집에 손을 벌릴 형편이 아니었던 채섭은 음대 시절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다. 주중에는 화장품과 정수기 방문 판매를 하고, 주말엔 결혼식 축가 연주를 다니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었다. 가장 쏠쏠했던 알바는 노래방에 들어갈 곡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음원을 디지털로 자동 변환하는 기술이 없어서 사람이 한 곡 한 곡 귀로 듣고 음표와 박자를 그려가며 노래방 버전으로 수동 전환했다. 그렇게 수백 곡의 노래를 완전히 해부해서 재조립했다. 고된 일이었지만 채섭에겐 ‘실전형’ 작곡 공부이기도 했다.
그는 “장애인도 성향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일종의 ‘장애 MBTI’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분노가 커 공격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과 협조적으로 살아가려는 부류도 있다는 뜻이었다.
“앞이 안 보이는 건 매일 매순간 의식하게 돼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장애와 친해지긴 어렵죠. 그렇다고 장애라는 거대한 돌덩이를 어디로 보내버릴 순 없어요. 보낼 때마다 기어이 반송돼서 오더라고요. 어차피 같이 가야할 존재라면 예쁘게 포장하고 부피를 최소화해서 마음 속 ‘냉장고’ 깊숙이 넣어두는 수밖에요.”
시력의 빈틈을 메워준 기술들
지난달 21일 채섭의 집을 찾았을 때 신곡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의 집은 곡을 함께 만드는 멤버들과의 작업실이기도 하다. 편곡과 믹싱 전문인 채섭은 작곡가 겸 보컬리스트인 서재윤 씨, 피아노 베이스 등 재즈 연주가인 황영훈 씨와 2년 전 ‘티스푼’이란 밴드를 결성했다. K팝이나 드라마, 뮤지컬 등에 쓰일 곡을 만들기 위해 각자 장기를 티스푼으로 모아보자며 힘을 합쳤다.
재윤이 기본 멜로디에 작사, 보컬을 담당하고 영훈은 여러 악기로 선율에 살을 붙인다. 채섭은 신디사이저 등을 이용해 믹싱과 편곡을 하며 완성도 높은 곡으로 버무려낸다. 한 때 음악을 포기하려던 채섭을 잡아준 게 바로 그 두 사람이었다.
“20년 넘게 해온 음악이지만 도저히 못 하겠다 싶더라고요. 근데 두 분이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며 힘을 줬죠. ‘이렇게 곡 잘 만드는 사람이 포기하면 국가적 손실을 넘어 우주적 손실’이라고 농담도 해주고….”
채섭을 일으켜 세운 건 사람이지만 그가 힘겹게 되살린 용기를 실현하도록 해준 건 기술이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시력의 한계를 메워주는 여러 기술이 모여 있다. 그는 아이맥(iMac) PC 앞에 앉아 능숙하게 작곡 프로그램을 다뤘다. 커서의 위치 등 모니터 화면을 설명해주는 ‘보이스 오버’와 화면을 크게 확대해주는 기능을 자주 썼다. 악보를 집중적으로 봐야 할 땐 ‘조디’라는 특수 확대기기를 머리에 쓴다. 이걸 쓰면 눈앞의 사물이 30배 정도 확대돼 보인다.
채섭이 PC에 아이패드를 연결하자 태블릿 화면이 전자 피아노 건반으로 바뀌었다. 그가 믹싱을 할 때 즐겨 쓰는 로직 리모트(Logic Remote)라는 애플리케이션(앱) 덕분이었다. “이 앱은 음악을 만드는 일종의 스케치북이에요. 10년 넘게 써와서 익숙하고, 화면도 크지 않아 웬만한 버튼이 어디 있는지 제 손이 다 알죠. 그래서 섬세한 정밀 작업도 가능해요.” 그는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피곤할 날에는 점자 단말기를 PC에 연결해 작업한다. 이런 첨단기기들은 사회복지법인 ‘따뜻한동행’ 등에서 지원을 받았다.
시력을 잃고 마음의 시야를 넓히다
채섭과의 인터뷰가 무르익어 가는데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좁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기자와 마주 앉은 채섭이 손으로 식탁 아래를 가리켰다. 호연이가 긴 몸을 바닥에 늘어뜨린 채 코를 골며 숙면 중이었다. 호연이는 채섭의 다리 맡에 머리를 두고, 통통한 엉덩이로는 기자의 두 발등을 깔고 앉은 상태였다.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발등의 낯선 온기는 그 엉덩이에서 전해져온 것이었다.
“호연이는 제가 평소 식탁에 혼자 있으면 적적할까봐 제 옆에 착 붙어 앉아요. 제가 밥을 다 먹거나 일을 마치면 호연이도 그제야 같이 일어나죠. 오늘은 비도 오는 와중에 ‘형아’랑 멀리 다녀오느라 피곤했을 거예요.”
비 내리는 날이면 채섭과 호연은 외출할 때 평소보다 신경이 곤두선다. 주변에 차량이나 사람이 있는지를 귀로 살펴야 하는데 빗소리 때문에 소리의 간섭이 많아진다. 채섭의 구령 소리가 호연이에게 잘 안 들리기도 한다. 호연이가 비옷을 입고 있어 ‘도그 토일렛’의 영문 약자인 DT1(소변), DT2(대변) 상황이 생기면 이 역시 만만치 않다.
평소에는 호연이가 길가에서 대변을 볼 땐 엉덩이 쪽에 비닐봉지를 고정시켜 처리한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에는 호연이에게 입혔던 비옷을 벗기고 하네스(반려동물의 몸을 고정하는 벨트)를 해체한 뒤 엉덩이 쪽에 비닐을 걸어야 한다.
“안내견의 변이 아예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교육을 받았어요. 변이 땅에 떨어지면 시각장애인들은 어디에 어떻게 떨어졌는지 안 보여서 줍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엉덩이에 비닐을 잘 채워야 하는데 비 오는 날에는 좀더 난이도가 높죠.”
채섭이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호연이와 동네 공원을 산책할 때다. 함께 걸으며 작업해놨던 음원을 다시 차분히 들어본다. 그러다 수정할 게 떠오르면 스마트폰에서 카카오톡 보이스 기능을 켜서 또렷한 발음으로 혼잣말을 한다. 그 음성은 바로 문자로 전환돼 ‘나와의 채팅방’에 전송된다. 집에 가선 이 문자를 다시 음성으로 전환해 들으며 곡을 고친다. 이런 기능이 있어 채섭은 지인들과도 활발히 카톡을 주고받는다.
그는 요즘 점자 공부에 어느 때보다 열심이다. 언젠가는 찾아올 ‘전맹(완전히 보이지 않는 상태)’의 삶을 지금부터 대비하려는 것이다. 14살에 실명해 ‘장애 나이’로 치면 올해 27세인 그는 “시력을 잃어가며 오히려 마음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전맹이었다면 더 나았겠다 싶을 때도 있어요. 눈이 더 안 보이는 상황에 매번 적응해야 하는 게 평생의 숙제거든요. 하지만 뒤집어보면 감사한 일이에요. 제가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 거니까요.”
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
<특별취재팀>
▽기획·취재: 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 ▽사진: 송은석 기자 ▽디자인: 김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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