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테크 아닌 평범한 기술로도
장애인들의 일상 한뼘씩 넓어져
"0.1% 희망만 있어도 포기 마세요"
“제가 조금 느립니다. 하지만 세계에서 제일 꼼꼼하고 안전하게 봐 드리겠습니다.”
분당서울대병원 건강증진센터 치과클리닉 이규환 교수(44)가 환자들에게 건네는 첫인사다. 그냥 인사치레는 아니다. 그는 손을 쓰지 못하는 의사다.
손을 쓰지 못하는 ‘중증장애 치과의사’
규환은 어깨와 손목을 약간 움직일 뿐, 목 아래로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장애 치과의사다. 그의 진료실은 두 가지가 다르다. 의사가 전동휠체어에 앉아 있고, 치과 도구를 잡을 때 손가락에 투명한 플라스틱 기구를 끼운다는 점이다.
“3단으로 부탁드립니다. 한 단만 더 올릴까요? 네, 감사합니다.”
규환의 요청에 따라 간호사가 페달을 밟자 환자가 앉은 진료 의자가 기계음을 내며 올라갔다. 간호사는 규환의 검지손가락에 끼워진 플라스틱 기구에 동전만 한 치과용 거울을 고정시켰다. 규환은 어깨와 손목을 천천히 움직이며 거울에 비친 환자 입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치석 관리를 아주 잘하셨네요. 훌륭합니다.”
이 병원에서 일한 지 올해로 19년 차인 규환은 검사와 판독, 상담, 예방클리닉을 주로 맡는다. 규환은 농담처럼 “저도 이제 연차가 좀 쌓여서요. 잘하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는 거죠”라며 웃었다. 2005년부터 여기서 일했으니, 벌써 20년차가 다 되어간다. 초반에는 일반 진료도 직접 했지만, 이제는 전문분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를 찾는 진료 예약은 대부분 꽉 차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가슴에 강철을 깔다
규환은 늘 웃는 인상이다. 무표정일 때에도 그렇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철벽으로 무장돼있다. 치대 본과 3학년이던 2002년, 중환자실에서 읽은 무협지에 나온 말이다.
“‘네 가슴에 강철을 깔아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야 사람이 살아간다고.”
키 188cm의 건장한 청년이었던 그는 병원 실습을 마치고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다 목뼈가 부러져 전신이 마비됐다. 늘 하던 대로 물에 뛰어들었지만, 그날은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목이 꺾였다. 한동안 스스로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중상이었다. 한 달쯤 지나자 간신히 어깨까지 감각이 돌아왔지만 그뿐이었다. 담당의는 규환에게 “평생 이렇게 살 준비를 하라”고 했다.
밤낮으로 비명과 울음소리가 가득했던 중환자실에서 버티기 위해 간호사들에게 부탁했다. 정말 바쁘겠지만, 혹시라도 짬이 나면 제게 책을 보여주실 수 있느냐고, 무슨 책이든 상관없고, 한 장씩 넘겨만 주시면 된다고.
중환자실에서 지낸 한두 달 동안 그렇게 100권 가까이 책을 읽었다. 성경부터 시작해 일본만화 ‘슬램덩크’ 시리즈, 소설 ‘갈매기의 꿈’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의 ‘인생 한 줄’이 된 문장들은 무협지에서 나왔다. 앞으로의 삶은 분명 상처로 가득할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일도 많을 것이었다. “그들이 네게 상처를 내지 못하게 가슴에 강철을 깔아라.” 그는 이 문장을 가슴에 품고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으로 ‘강해지기’를 택했다.
모두가 말린 ‘1년 만의 복학’
규환은 사고 1년 만에 치대에 복학했다. “전신마비 치과의사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모두가 말렸다. 법학으로 진로를 바꾸라는 설득도 많았다. 하지만 규환은 사고를 당했다고 가던 길을 틀고 싶지는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내가 이 몸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만 번은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정말 0.1초라도 치과의사로 살아보고 싶더라고요.”
당시 교내에는 장애인 시설이 거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에선 동기들이 규환이 탄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교수 연구실이나 실습실에도 문턱이 하나씩 있었다. 혼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누군가 도와줄 때까지 무한정 ‘뻗치기’를 했다.
손을 쓸 수 없으니 필기도 할 수 없었다.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챙겨준 필기와 교과서를 눈으로만 보고 외웠다. 그는 “원래도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다치고 나서 더 좋아진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하지만 웃을 일이 아니었다. 남들처럼 밤늦게까지 실습을 하고, 하루종일 필기를 노려보며 공부하다가 욕창이 생겼다. 그래도 버티다 정신까지 잃었다.
진료 실습 땐 치과용 기구를 손가락에 고정시키기 위해 고무줄로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꽉 동여맸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기구가 많아 손에서 빠지면 환자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진료를 하며 환자의 입안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다 보면 손가락이 기구에 찔리고 베이는 일이 많았다. 그의 손은 늘 상처투성이였지만 그렇게 부딪히며 기회의 문을 하나씩 열어갔다.
맨땅에 헤딩 대신 ‘헬멧 쓰고 헤딩’
어렵게 중증장애 치과의사의 길을 개척해 온 규환이 모두에게 ‘무식하고 지독한’ 방법을 권유하지는 않는다. 그가 늘 후배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헬멧 쓰고 헤딩’하는 건 천지차이”라는 것.
가만히 앉아 더 좋은 신기술과 첨단장비가 개발되기를 기다리는 대신, 가진 것을 총동원하고 없는 것을 직접 만들어내며 한 발짝씩 나아갔다. 아무 정보도 없이 ‘맨땅에 헤딩’을 너무 많이 하다가 문자 그대로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
의사를 꿈꾸는 후배들뿐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앞선 ‘선배 장애인’들의 경험과 노하우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말한다. ‘헤딩’을 망설이지 말되, 가능한 좋은 ‘헬멧’을 쓰라는 것이다.
특히 든든했던 헬멧으로 그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과 국립재활원을 꼽았다. 전동휠체어와 욕창방지용 방석 등을 지원받았고, 무엇보다 치과 진료에 필요한 기구를 맞춤 제작할 기회도 얻었다.
국립재활원에서 보조기기를 맞추는 경로는 보통 두 가지다. 하나는 규환처럼 국립재활원 부속 재활병원에 입원하는 경우, 또 하나는 외래로 방문해서 직접 의뢰하는 경우다. 수요자의 상태와 생활패턴 등을 고려해 만들고 사후관리까지 해준다. 기존에 없던 기기를 신규 제작하는 경우엔 길면 수개월까지 소요된다.
규환은 이곳에서 치과 도구들을 간편하고 빠르게 손가락에 고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세상에 없던 기구’를 국립재활원 전문가들과 함께 개발했다. 투명한 플라스틱을 원통처럼 말고, 끝엔 도구를 꽂을 수 있도록 고정용 고무를 장착했다. 고무 부분이 도구를 단단하게 고정시켜주는 강도를 세 단계로 구분해 각각 색깔을 달리 했다. 또 폴리염화비닐(PVC) 소재로 만들어 끓는 물에 살짝 담그면 모양을 손쉽게 다시 잡을 수 있도록 했다.
첨단 하이테크는 아니지만 장애인마다 각기 다른 수요에 딱 맞게 제작한 로테크(low-tech), 미들테크(middle-tech) 기기들은 가볍고 저렴하면서도 큰 효과를 낸다. 서울 강북구 국립재활원에서 만난 재활병원부 김온유 척수손상재활과장과 보조기기제작실 김지민 주무관은 그동안 개발한 보조기기들을 제작실 작업대에 한가득 펼쳐 보였다. 두 사람은 규환의 보조기구 제작에도 참여했다.
“팔과 손이 마비된 분이 계셨는데 자신의 손으로 물을 마시고 싶어해 전용 컵 홀더를 만들어 드렸어요.”
“비슷한 장애가 있는 다른 분에겐 스마트폰으로 카톡을 할 수 있도록 손가락을 끼워서 쓸 수 있는 터치펜을 만들어 드렸고요.”
장애를 갖는다는 건 아주 일상적인 일조차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일상’은 각자 다르다. 컵을 잡거나 물을 마시거나 화면을 터치하는 것은 비장애인에게는 엄청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맞춤형 기구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은 “잃어버렸던 일상을 하나씩 되찾을 때마다 삶이 한 뼘씩 확장되는 것 같다”고 전한다.
● “장애인에게 진료받기 싫다” 화내던 환자들을 넘어
규환은 힘겹게 치대를 졸업했다. 하지만 곧바로 의사가 될 수는 없었다. 자신을 받아주는 병원을 찾기가 힘들었다. 서류를 통과해도 휠체어를 타고 가 면접을 보고 나면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병원장, 부원장, 기조실장 등 각종 ‘실장님’들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전화했어요. 단 10분이어도 좋으니 진료를 보여 드릴 기회를 달라고요.”
오랜 두드림 끝에 수화기 너머에서 긴 한숨과 함께 “한번 와 보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규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휠체어를 탄 상태로 시험 진료를 하던 날, 병원 의료진들이 우르르 구경을 와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치과의사가 된 뒤에도 고비는 남아있었다. “진료실에 들어와서 저를 보고는 재수 없다고 ‘퉤’ 하며 침을 뱉는 환자분도 있었어요. ‘내가 왜 병신한테 진료를 받아야 하느냐’고 병원에 컴플레인(항의)하는 분도 많았고요.”
환자 열 명 중 일곱 명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나머지 두세 명은 쭈뼛대며 진료 의자에 앉았다. 규환은 그들에게 “보시다시피 제가 몸이 불편하고 좀 느립니다. 근데 실력은 최고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꼼꼼하고 안전하게 봐 드리겠습니다”라며 다가갔다.
점차 그를 다시 찾는 환자들이 생겨났다. “그때 깔끔하게 진료해줘서 시원했다” “꼼꼼하게 설명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거친 손에 새겨진 20년의 흔적
다치기 전, 규환은 위만 보고 살았다. 부족함 없는 가정형편, 어디 가서 밀리지 않았던 두뇌와 건강한 신체를 가진 그였다. 치대에 진학한 것도 사명감 때문은 아니었다. 공부를 잘 하면 의사가 되어야 하나보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고 나면 좋은 집, 좋은 차를 사고, 돈 많이 벌며 편하게 살지 않을까 짐작했다.
다친 뒤, 그는 스스로 ‘바닥’이라고 생각한 곳에 닿았다. 처음으로 위 대신 아래와 옆을 보게 됐다. 중환자실에 누워 순간마다 기도했다. 제 몸을 다시 예전처럼 돌려놓아주신다면, 이 몸을 정말정말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쓰겠노라고.
“울면서 수없이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다 주진 않고 팔만 이렇게 조금 돌려주셨네요.”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이며, 규환은 말했다. ‘조금’ 돌려받은 팔로 의사가 된 뒤, 중환자실 침대에서의 약속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사고 때문에, 절망 때문에, 후유증 때문에, 규환은 수차례 거의 죽어봤기 때문에 오히려 하루하루의 최선과 진심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를 낳은 뒤, 규환은 육아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육아 철학도 “넘치게 사랑하고 부족하게 키우자”로 정했다. 잔소리 대신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6살배기 딸은 아빠의 무릎과 어깨 위로 기어올라가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장난을 친다. 조그마한 손가락으로는 아빠의 굳은 손을 쥐고 흔들며 “아빠 손은 괴물 손!”이라고 놀린다.
그의 두 엄지와 손마디는 큼직한 굳은살이 뒤덮어 얼룩졌다. 근육이 빠져 가늘고 긴 팔과 어울리지 않게 울퉁불퉁한 손을 보며 “영광의 상처”라고 말했다. 20년도 더 전부터 도구에 베이고 찔리고 진물이 나도록 끈과 고무줄로 동여맨 흔적이다.
이제 규환이 진료 때마다 손가락에 끼는 투명한 플라스틱 기구는 간단해 보이지만 그에겐 간단치 않다. 그의 손에 더 이상 피와 진물이 흐르지 않게 해주고, 치과의사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기구이기 때문이다. 그냥 주저앉지 않고, 0.1%의 가능성에도 포기하지 않고 20년 넘게 싸워왔다는 증거가 그 손에 담겨있다.
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
<특별취재팀>
▽기획·취재 : 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 ▽사진 : 송은석 기자 ▽디자인 : 김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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