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한민수(가명·38) 씨의 시간은 22년째 집 안에 머물러 있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지만 직업을 가진 적도,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없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2001년 무렵 지속적인 학교폭력으로 인해 시작한 등교 거부가 긴 은둔과 고립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 씨도 여러 차례 사회 활동을 해 보려 했다. 고등학교를 그만둔 후 대안학교에 진학했고, 병원을 다니며 심리 치료도 받았다.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대학 진학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방 문턱을 넘어 세상으로 나갈 때마다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22년간 네 차례의 재고립을 겪은 한 씨의 고립은 현재진행형이다.
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고 사회와 단절된 채 지내는 ‘은둔형 외톨이’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재은둔·재고립과 관련한 조사와 대책은 미비한 실정이다. 이에 동아일보는 지난달 7∼15일 재단법인 청년재단과 함께 은둔·고립 경험이 있는 만 19∼39세 청년 403명을 대상으로 ‘재고립 경험 설문’을 실시했다. 그 결과 은둔·고립 경험이 있는 청년 403명 중 237명(59%)이 “은둔·고립을 중단하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은둔·고립 상태로 돌아간 적이 있다”고 답했다.
“용기 낸 취업 도전, 끝내 좌절… 내편 없다는 충격에 3년 재은둔”
방으로 다시 숨어든 고립 청년들 11년째 외톨이 생활 반복 32세, “냉혹한 현실 마주할 용기 사라져” 학업 스트레스후 세상과 단절 37세, “고통 잊으려 폭식, 한때 150kg” 사회복귀 시도 실패하며 재고립… 전문가 “은둔, 첫번째보다 심화”
‘왜 이렇게 밝지?’
2020년 6월, 인천에 사는 강재훈(가명·32) 씨는 자신의 원룸 현관문을 나서다 낯선 풍경에 당황했다. 마지막으로 본 풍경은 분명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어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 속에서 두꺼운 옷을 입고 걷는 발걸음이 어색하기만 했다. 강 씨는 “여러 차례 은둔했지만 문을 여니 계절이 바뀌었던 당시 상황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 은둔·고립 청년 59%가 ‘재고립’
강 씨의 ‘은둔형 외톨이’ 생활은 2012년부터 시작됐다. 중학생 시절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를 보면서 느낀 충격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자해와 조울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밖으로 못 나가는 날이 많아졌다. 그는 11년째 고립과 은둔을 반복 중인 ‘재고립 청년’이다.
강 씨에게 방은 안전한 공간인 동시에 떠나고 싶은 공간이기도 했다. 그는 “방 안에 있으면서도 사람이 그리웠다. 그런데 나가서 만날 사람들을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섰다”고 했다.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취업도, 창업도 시도해 봤지만 마주해야 하는 현실은 냉혹하기만 했다.
20일 서울 강북구에서 만난 강 씨는 이날 외출도 2주 만이라고 했다. 그는 “올해 초에도 두 달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세상은 잘 굴러가는데 혼자 뒷걸음질 치는 느낌에 점점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떨어진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방이나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은둔과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돼 물리적 정서적으로 외톨이 상태인 고립이 6개월 이상일 경우 은둔·고립 청년으로 분류한다.
동아일보와 청년재단이 지난달 7∼15일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만 19∼39세 은둔·고립 청년 중 59%가 강 씨와 같은 재은둔·재고립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은둔과 고립이 반복되는 이유는 다양했다. 대학 시절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150kg까지 살이 찌며 세상과 단절을 시작했다는 손명준(가명·37) 씨는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위가 아플 때까지 음식물을 밀어 넣다 보니 입학 당시 60kg대 였던 몸무게가 졸업할 때 130kg까지 불었다”고 했다. 체중이 늘면서 자신감을 잃고 밖에 나가기 싫어졌다는 손 씨는 “길게 보면 11년, 짧게 보면 7년 동안 7∼8번 정도 은둔과 고립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 “세상 나가려는 용기가 좌절되며 재고립”
취재에 응한 재고립 청년들은 “용기를 내 세상으로 나가려는 시도가 좌절로 끝나면서 다시 틀어박히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22년째 은둔과 고립을 반복 중인 한민수(가명·38) 씨 역시 2017년 한 대기업 협력업체 현장근무자로 취업이 확정됐다. 하지만 업무 교육 중 은둔 기간에 얻게 된 정신질환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취업이 취소됐다. 한 씨는 “가벼운 정신질환이었는데도 누구 하나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며 “사회가 나를 이렇게 보는구나를 뼈저리게 느끼며 그 충격으로 다시 2∼3년간 은둔하게 됐다”고 말했다.
재고립 청년들은 고립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기 위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강 씨는 “최근 은둔 극복을 위한 프로그램은 여기저기서 생기고 있지만 사회로 나온 이후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고 생활해야 하는지 지속적으로 도와주는 프로그램은 없다”고 했다.
손 씨도 “현실적으로 오래 은둔했던 사람은 사회적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은둔·고립 기간이 길어지면 말하거나 걷는 것조차 어색하게 느껴진다. 기본적인 사회생활부터 시작해 지속적인 일 경험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정착하도록 도와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재고립 청년들의 사례를 보면 대체로 은둔·고립 기간이 길수록 재고립에 빠지게 될 확률이 높았다. 방 안에서 지낸 시간이 장기화되면서 빠르게 바뀌는 세상과 시차가 커지기 때문이다. 사회성과 자신감도 갈수록 떨어지게 된다. 결국 첫 은둔·고립을 방치하지 말고 초반에 대처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 “재고립 시 심화 경향, 단계적 지원 필요”
전문가들도 은둔·고립 청년의 사회 복귀를 단계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유민상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회 복귀 시도가 실패한 재고립의 경우 첫 번째 고립보다 더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며 “은둔·고립 청년을 발굴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이들이 안정적으로 사회에 정착하도록 제도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했다.
또 “부처 간 협업을 통해 심리 상담, 일 경험 등 단계적으로 사회 복귀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하는 일종의 ‘에스컬레이터’가 있어야 재고립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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