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는 상가의 한 학원에 이런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사교육 과열 지역도 아닌데 이런 학원이 있다고 신기해한 게 벌써 작년 일이다. 이제 초등 의대반은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학원이 됐다. 네 살부터 ‘닥수’(닥치고 수학) 인생을 시작하는 게 요즘 현실이다. 의대 가는 데 중요한 수학 점수를 높이기 위해, 유명 수학학원에 합격하고 레벨이 강등당하지 않도록 말이다.
아이가 뛰어난 의술을 베푸는 의사가 되길 바라는 마음보다는, 의대에 가서 성공한 삶을 살 길 기대하는 학부모가 대부분이다. 학령인구가 급감하는 상황에서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내 아이의 불확실한 미래는 견딜 수 없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수없는 경쟁을 경험한 수험생들도 대학입시 관문에서는 부모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2023학년도 대입 정시모집에서 서울대 이공계열 합격점수(대학수학능력시험 백분위 평균 기준, 93.9점)가 처음으로 고려대(94.9점), 연세대(94.2점)에 밀렸다. 대입정보포털 ‘어디가’에 각 대학이 공시한 입시자료를 동아일보와 종로학원이 분석한 결과다. 최상위권 수험생들이 의약학계열을 선택한 탓에 서울대 이공계열 합격점수가 낮아진 것이다.
상위권 대학 합격 뒤에도 의대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는다. ‘대학알리미’에 공시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2023년 중도탈락자는 2131명으로 최근 5년간 가장 많았다. 같은 대학 친구들끼리 손잡고 재수종합학원에 가기도 한다. 2024학년도 수능 지원자의 35.3%(17만7942명)가 N수생, 검정고시 출신 등으로 1994학년도 수능 도입 이래 세 번째로 높은 이유다. 정부는 의대 정원을 2025학년도부터 늘리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수험생들은 너도나도 ‘지금이 의대 갈 찬스’라고 말한다.
의대에 목을 매는 학부모나 학생을 탓할 수는 없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학원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벤처가 터집니까, 세계적인 기업이 나옵니까? 의사만큼 확실한 직업이 어디 있나요? 공산당이 내려와도 의사는 살려준다고 하잖아요.”
현 정부는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등 첨단분야 인재를 양성하겠다며 2024학년도 첨단학과 정원을 대폭 늘렸다. 그러나 정원이 적어서 인재가 없던 게 아니다. 열심히 공부한 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취업은 불안정한데 처우도 안 좋고, 박사까지 공부해 봐야 그만큼 보상도 받지 못할 것 같고, 창업은 더 불안하다. 요즘 이공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다. 이걸 정부가 바꾸지 않으면 의대 광풍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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