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비가 내리는 밤, 파주 탄현파출소에서 근무하고 있던 이봉준 경위는 자유로에서 역주행 접촉 사고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다행히 접촉 사고는 큰 사고가 아니었다. 양쪽 차량 모두 범퍼만 파손됐고 운전자와 동승자 또한 아무런 부상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이 경위는 당시 사고에 의문점이 많았다. 차가 역주행하려면 운전자가 도로를 헷갈리거나 인터체인지(IC)에서 잘못 진입해야 하는데 파주 일대 주요 도로는 넓고 헷갈릴 수 없는 구조여서 역주행 사고가 거의 없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사고를 낸 60대 남성 A 씨의 차 내부는 일반인의 차보다 지저분했다. 차 안에서 A 씨가 복용하고 있는 혈압약이 발견됐다.
이 경위는 A 씨에게 ‘왜 사고를 냈냐’고 물었다. 그러자 A 씨는 “사업이 좀 안 풀려서 나흘 동안 잠을 못 잤다”며 “거의 3시간 정도 잤고 그래서인지 계속 머리가 아파서 착각한 것 같다”고 진술했다. 이 경위는 A 씨에게 운전면허증을 요구했지만, A 씨는 허둥대며 운전면허증을 두고 왔다고 진술했다.
이 경위는 그가 음주나 마약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주·마약 측정 모두 정상으로 나왔다.
이 경위의 의문점은 끊이질 않았다. 대다수 사고 가해자는 자신이 한 행동에 죄책감을 느꼈지만, A 씨는 달랐다. 그에게선 그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가해자를 귀가시키라는 지시, 하지만…
이 경위는 관련 상황을 모두 상황실에 보고했고 상황실은 A 씨를 귀가시키기로 했다.
이 경위는 그 순간 사고 현장에서 봤던 것보다 더 어눌한 답변을 하는 A 씨의 상태가 보였다. 이 경위는 A 씨에게 “선생님, 오늘 치과 치료를 받으셨나요?”라고 물었고 A 씨는 전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가지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A 씨의 눈을 자세히 살펴봤다.
이 경위는 당시 상황에 대해 “A 씨의 눈은 일반 사람들이 피곤할 때 느끼는 눈빛보다 더 내려가 있었다”며 “해당 증상은 뇌의 어느 한쪽이 막혀 혈액순환이 안될 때 눈을 짓누르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A 씨가 뇌출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이 경위는 A 씨에게 걸어보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A 씨는 난간을 잡고 걸었음에도 중심을 못 잡고 몸을 휘청댔다. 이 경위는 즉시 상황실에 A 씨가 뇌출혈 증상이 있다고 보고했다.
경찰 상황실의 유동적인 판단, 주변인 협력이 합쳐져 만들어진 기적
“어떻게 보여? 뇌출혈이 맞는 것 같아?”
“저는 뇌출혈이 맞다고 봅니다. 이대로 집에 보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민간인의 생명이 걸린 보고가 들어오자 상황실은 이 경위의 보고를 세심히 들었다. 이 경위의 보고를 받은 상황실은 즉시 119 구급대를 경기북부 소방청에 요청했다.
지원요청을 한 지 얼마 안 돼 119 구급대가 탄현파출소에 도착했고 이 경위는 구급대원들에게 A 씨의 증상을 상세히 설명했다. 구급대원들은 이 경위의 말을 아무 제지 없이 경청했고 뇌출혈이 맞다는 가정하에 A 씨의 후송을 준비했다. 이 경위는 A 씨를 데리고 가기로 한 지인에게도 상황을 설명했고 협력을 요청했다. 지인은 A 씨의 부인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게 도와줬다.
하지만 당시 A 씨의 부인은 남편이 다음 주에 일산에 있는 한 병원에 예약을 잡아놨으니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고 다음 주 병원 내원할 때 자세히 살펴보겠다고 전했다. 이 경위는 A 씨의 부인도 설득했다.
이 경위는 A 씨 부인이 빠르게 도착해 준비할 수 있도록 A 씨를 파주 인근 병원이 아닌 진료를 볼 예정이었던 일산의 병원으로 이송해 달라고 119 구급대에 요청했다. 구급대원들은 흔쾌히 일산 병원으로 남성을 빠르게 이송했다.
교통사고 가해자에서 뇌출혈 긴급환자로
병원으로 후송된 A 씨는 병원에 도착하기 직전 뇌출혈 증상이 심해졌다고 한다. 병원에 도착하자 담당 의사들은 이 경위가 제시한 내용을 믿고 기초 검사를 하지 않은 채 바로 A 씨의 응급수술을 시작했다. 그 결과 A 씨는 뇌출혈 후유증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음날 A 씨의 경과가 궁금했던 이 경위는 A 씨의 지인과 부인에게 연락을 했고 두 사람으로부터 공통된 한마디를 들었다.
“경위님 덕분에 우리 형님(남편)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A 씨는 지금 정상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잠재적 뇌출혈 환자를 살린 20년 형사의 직감
이 경위는 20년 전 처음 형사 생활을 시작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파주경찰서 형사계에 심부름을 하러 갔다가 형사가 됐다.
이 경위는 “형사계를 담당하고 있던 분이 저를 유심히 봤다”며 “그 당시에는 덩치가 좋고 차와 노트북이 있는 사람이면 무조건 형사계로 데려왔다”고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20년 동안 파주에서 형사로 크고 작은 활약을 했다. 지적 장애가 있는 미성년 여성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성 노리개로 삼고 그들을 조종해 범죄를 저지른 악명 높은 수배자를 체포하는 등 여러 사건을 해결했다. 그는 형사로써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경위는 “수배범을 체포할 때 버스에 깔려 죽을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편의점 안에서 담배를 사려는 범인을 잡았고 그때 기분은 최고였다”고 했다.
뇌출혈 증상이 있던 A 씨를 살린 것도 이 경위의 20년 형사 생활 노하우 덕분에 가능했다고 한다. 그는 “형사시절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들어가서 사인을 모르는 시체를 분석하기 전에 부검의와 사전 인터뷰를 했다”며 “그런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면 각종 사인들을 알 수 있고 갖가지 지병의 증상을 알 수 있는데 뇌압으로 사람의 눈이 내려가는 것과 중심을 잡지 못하고 걷는 것도 국과수에서 뇌출혈의 징조라고 배웠다”고 전했다.
이 경위는 이번 일이 경찰 상황실, 119 구급대, 남성의 주변 인물들의 협조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기적이라고 말했다.
가슴뛰는 형사생활…하지만 가족들을 위한 큰 결심
이 경위는 파주경찰서 형사계에서 탄현파출소 생활계로 보직을 옮긴 지 3년이 다 되어 간다. 그는 “지금도 형사 시절 뛰어다니는 걸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생활계로 보직을 옮겼을 때 6~7개월간은 가슴이 뛰면서 다시 돌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그는 “형사 때는 밤, 새벽에 뛰어다니고 아침이 돼서야 집으로 들어왔다”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을 때는 집에 들어와 암막 커튼엘 치고 핸드폰을 밖에 놔두고 쉬어야 정신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아침에 들어와 정신없이 자다 보면 어느새 어린 딸이 그의 곁에서 자곤 했다. 하지만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그는 딸을 두고 다시 경찰서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핸드폰이 울리면 아빠가 나가야 한다는 걸 어린 딸이 알아버렸다. 하루는 평소 울려야 할 핸드폰이 울리지 않아 늦게 일어났는데, 딸이 새로 산 제 핸드폰을 화장실 변기에 넣어버린 거였다”며 “어린 딸은 핸드폰이 안 울리면 내가 안 나갈 줄 알았다고 한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 경위는 또 “딸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아무런 추억이 없었다”며 “형사 시절에는 휴가도 집안 급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못 썼고 그런 점이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했다”고 회상했다.
딸이 점점 나이를 먹고 그의 부모님 또한 몸이 불편한 곳이 생기기 시작하자 이 경위는 생활계로의 보직 변경을 고민했다. 그는 1년 동안 갈등했지만, 가족들과 더 시간을 갖자는 생각이 확고해 형사 생활을 그만뒀다.
이 경위는 “선배들은 30년 혹은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형사 생활을 하는데 난 20년 만에 그만둬서 후배 형사들에게 미안한 감이 있다”며 “하지만 가족들을 위해서 큰 결심을 했고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그는 다시 한번 119 구급대 요원들과 협조한 지인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