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교육청의 상담지원 프로그램
영유아 시기 ‘사교육 스트레스’
정서 불안-이상 행동 보이거나, 상상력 발달 저해 요인 되기도
유아교육진흥원, 상담기관 연계… 자기주도적 놀이로 안정 되찾아
#사례 1. 유아 대상 영어학원(속칭 ‘영어유치원’)에 다니던 A 군은 초등학교 입학 후 다닐 영어학원의 레벨 테스트를 받던 중 갑자기 섬망(譫妄) 증세가 나타났다. 시험지의 단어를 읽지도 못하고, 불안해하더니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수년간 부모에게 받아온 공부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이날 테스트는 가장 높은 수준의 반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이었다. 불안 증세가 지속된 A 군은 한동안 심리 상담을 받아야 했다.
#사례 2. 어릴 때부터 부모가 학습 시간과 행동을 철저히 관리해온 B 군은 5세 무렵 갑자기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배변을 거부하고,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몰래 버리는 일이 반복됐다. 이는 부모의 통제력이 너무 강했을 때 간혹 나타나는 행동이다. 식사, 배변 등 일차적인 욕구를 부모가 싫어하는 방향으로 행동해 반항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 코로나19-사교육 부담에 정서 위기 증가
최근 이처럼 불안, 우울 등 정서행동 위기를 겪는 영유아가 늘고 있다. 유아교육 관계자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국에 비대면 수업이 이뤄진 영향으로 언어와 사회성 등 발달 지연을 겪는 아이들이 증가한 데다, 한글도 못 뗀 시기부터 시작되는 각종 사교육으로 인한 스트레스 영향으로 분석한다.
서울시교육청 유아교육진흥원은 이런 고민이 있는 가정을 상담 기관과 연계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아이와 부모가 각각 40분씩, 총 10회의 상담 및 놀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코로나19 이전에 평균 2 대 1이었던 경쟁률은 올해 약 10 대 1까지 높아졌다. 황보영 유아교육진흥원 기획연구과장은 “가족 기능이 약화되고 구성원이 줄어들면서 아이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의 정서 지원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15일 방문한 서울 강남구 봄아동청소년심리발달센터는 유아교육진흥원이 연계한 상담 기관 네 곳 중 한 곳이다. 상담실 책상에는 모래로 가득 찬 넓은 판이 올려져 있었고, 다양한 피규어와 인형 등 장난감들이 방 안 가득 진열돼 있었다. 조은아 심리상담사는 “아이들이 스스로 좋아하는 장난감을 갖고 놀며 욕구를 해소한다. ‘엄마가 싫어해서 마음껏 축구를 못 한다’며 속얘기도 하고, 배변 활동을 못 하던 아이는 긴장이 완화돼 스스로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 과도한 인지교육, 아이 발달 방해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사교육 시작 연령도 낮아지는 추세다. 그러나 유아교육 전문가들은 취학 전 아동에게 과도한 학습 부담을 주는 것을 경계한다. 놀이가 중심이 돼야 할 시기에 인지교육에 치중하면서 그 시기에 필요한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가령 센터에 온 유아 중에는 ‘상상놀이’를 못 하는 사례도 있었다. 답을 찾는 데만 익숙해지다 보니 상상력이 필요한 경우나 추상적인 개념 앞에 막막해지는 것이다. 물감 놀이를 할 때면 마음껏 색을 섞지 않고 “어떤 색을 얼마나 섞을지 정확하게 알려 달라”고 묻는 등 또래답지 않은 행동을 보였다. 오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강민수 봄아동청소년심리발달센터 소장은 “상담 후 6개월이 지나니 선생님께 괴물 역할을 해 달라고 요구하는 등 변화가 나타났고, 친구들과 사이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센터에서 부모와 아이의 놀이 시간을 관찰해보면 실제로 놀이가 아닌 학습에 방점을 찍는 경우가 많다. 아이 눈높이에 맞춰 노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주입하는 데 치중하는 것이다. 강 소장은 “부모가 장난감 자동차의 색깔을 묻고, 영어로 ‘레드’라고 일러주는 식이다. 부모가 원하는 학습식 놀이를 강요하면 아이는 금세 흥미를 잃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가짜 놀이’와 ‘진짜 놀이’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식 주입을 목적으로 놀이를 병행해놓곤 ‘놀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안명현 센터장은 “놀이는 목적이 없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 또 자기 주도적으로 해야 진짜 놀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마음대로 안 되는 내 자식, 부모는 인내해야
정서행동 위기를 겪는 아이들의 문제는 곧 부모의 문제일 때가 많다. 전문가들은 “자녀에 대한 객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최근 외동 가정이 많아지면서 아이가 또래와 지낼 때 보이는 행동 특성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유치원 교사인 이솔아 유아교육진흥원 팀장은 “유치원에서 단체 생활에서의 규칙 숙지, 친구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알려줘도 ‘집에선 잘 지내는데, 선생님이 잘못 돌보는 것 아니냐’며 교사 탓, 다른 아이 탓을 하는 부모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단기간에 자녀가 달라질 것이란 기대를 접고,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부모로서 겪게 된 인생의 ‘첫 실패’ 앞에서 담담해질 필요가 있다. 강 소장은 “학창 시절부터 직장까지 인생의 큰 위기가 없던 부모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육아와 교육 앞에서 생애 첫 좌절감을 느낀다. 부모로서의 무게를 견디는 것이 아이를 회복시키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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