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왜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가 많을까. 이번 추석 연휴에 프로그래머 출신 벤처기업 사장, 수학에 관심 많은 철학자, 그리고 다빈치스쿨 교장인 필자 3명이 만나 관련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는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수학 잘하게 하는 방법 있을까”
필자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수학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공감하지만 현실을 보면 수학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너무 많다. 수학을 왜 배울까. 모든 사람이 수학을 잘할 필요가 있을까. 가장 궁금한 부분은 수학을 싫어하고 못하는 아이도 수학을 잘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철학자 학생들이 수학을 못하는 이유는 수학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학은 입시에만 필요하다. 수학을 못하는 아이의 무의식 속에는 학교를 졸업하면 수학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자각이 자리한다. 현실 세계에서 성공하는 데, 돈을 많이 버는 데 수학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벤처기업 사장 한국이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에는 영어를 잘하는 것이 성공의 기준이었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는 맞는 이야기다. 영어 사교육에 엄청난 돈을 쓰고 조기 유학도 보내는 등 온 나라가 영어에 미쳐 있었지만 이제는 외국어 능력이 과거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요즘에는 오히려 수학과 통계학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프로그래머가 수학을 못하는 것이 큰 문제다.
철학자 근본적 질문을 통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문제 원인을 잘못 알고 있으면 문제를 더 복잡하고 해결 불가능하게 만든다. ‘허프포스트코리아’에 실린 이찬승 교육을바꾸는사람들 대표의 글 ‘수포자의 잘못된 원인 분석이 잘못된 해법을 부른다’를 읽어보라. “뇌는 철저히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환경에 반응하고 적응한다. 만약 수학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수학을 공부하려고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교육부와 교사들이 수학 공부의 동기 부여에서부터 실패하고 있다는 얘기다.
필자 한국은 수포자에 대한 인식부터 문제가 있다. 아직도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는 식의 낡은 패러다임을 넘지 못하고 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라도 많이 가르치면 할 수 있다며 노력을 강조한다. 하지만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은 정말 안 되는 것일까. 현장의 목소리가 궁금하다. 개발자를 많이 고용한 분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 많을 것 같다. 사람을 뽑을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부분이 무엇인가.
벤처기업 사장 딱 2가지를 본다. “수학을 얼마나 잘하는가”와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졌는가”다. 많은 경우 두 특징은 사실 하나다. 수포자는 수학이 어려워서 생기는 게 아니라,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포기하기 때문에 생긴다. 사실 큰 문제는 한국 개발자들이 수학을 못한다는 점이다.
철학자 중고교에서는 한국 학생들이 수학을 잘하는데 대학원에 가면 반대의 평가를 듣는다. “한국 사람들이 수학에 약한 거 같다. 다들 Robust(엄밀)하지 않고, 논리에 구멍이 많다”는 것이다.
벤처기업 사장 요즘 한국 개발자를 쓰지 않고 중국, 베트남, 인도 개발자에게 80% 이상 외주를 주고 있다. 저렴한 비용에 작업 속도가 빠르고 퀄리티도 좋다.
AI 시대에는 수학 공부 달라야
집으로 가는 길에 언론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2교시 수학 영역을 응시하지 않은 수험생이 20명 중 1명꼴로, 8년 만에 최고치라는 것이다. 현행 입시제도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지만 의문도 뒤따랐다. 수학학원이 넘쳐나고 소위 일타 강사의 온라인 강의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교육 환경에서 왜 수학을 못하는 학생이 이렇게 많을까. 수포자는 왜 계속 생겨날까. 혹시 수포자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AI 시대에도 수학 교육은 여전히 필요할까 같은 질문의 반복이다.
한국 학생들은 내신이나 입시를 위해 선행 학습과 기계적 문제 풀이로 수학을 공부한다. 이 때문에 사고력과 문제 해결력을 요구하는 고학년이 될수록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수포자가 된다는 것이 통상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들이 수학을 못하는 이유는 “입시나 내신 같은 실용적 목적 외에는 수학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포자는 수학 내용이 어려워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쉽게 포기해서 생긴다. ‘스탠퍼드 수학공부법’의 저자 조 볼러에 따르면 학생들이 수학을 포기하는 이유는 수학에 대한 부정적 경험과 트라우마 탓이다. “똑똑한 아이가 수학을 잘한다” “원래부터 수학을 못하는 아이가 있다” 같은 잘못된 통념이 아이들이 창의적으로 수학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수포자에 대한 이러한 진단은 “왜 수학을 배우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수학은 ‘정답’을 맞히려고 배우는 것이 아니다. 결론에 이르기까지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상상력을 동원해 창의적 해법을 고민하는 과정 전체를 배우는 것이 수학이다. 문제를 보고 읽는 방식, 해석하고 접근하는 방식 자체를 배우기 위한 것이다. 수학을 못하는 이유는 오직 정답을 많이 맞혀 점수를 잘 받기 위해 공부하기 때문이다. AI 시대에는 수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수학은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고 그 패턴을 추상화해 수식으로 표현함으로써 변화를 이해하고 예측하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탄생한 학문이다. 이는 표면적으로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파편화된 정보들을 연결해 새로운 패턴을 창조할 것을 요구한다. 수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라기보다 창의적 논리의 예술에 가깝다. ‘어느 수학자의 변명’을 쓴 영국 수학자 G. H. 하디는 이렇게 말한다. “수학자는 화가나 시인처럼 패턴을 만드는 사람이다. 화가나 시인보다 수학자가 만드는 패턴이 더 영속적인데, 그 이유는 생각(관념)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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