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제과업체에 다녔던 서모 씨(48)는 4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경기 파주에 북카페를 차렸다. 당시 과장으로 한창 일할 나이였지만 앞이 캄캄했다. 서 씨는 “10년 뒤 부장이 된다 해도 그 이후는 장담하기 어렵고, 어차피 나갈 거면 한 살이라도 일찍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에서 법정 정년(60세)을 채운 선배를 본 적이 없다. 업무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한참 어린 후배 밑에서 일하게 하거나, 대기 발령을 내는 방식으로 자발적 퇴직을 유도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임원으로 승진하지 않는 한 정년까지 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2016년 ‘법정 정년 60세’가 시행된 지 8년째인 올해, 정년 65세 연장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올 1월 고용노동부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계속고용을 위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직장인들은 지금의 정년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동아일보가 지난달 취업플랫폼 인크루트에 의뢰해 20∼40대 직장인 1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스스로 퇴직하고 싶은 나이’는 평균 60세로 법정 정년과 동일했다. 반면 ‘실제 퇴직할 것으로 예상하는 나이’는 평균 53.1세였다. 제도와 현실의 괴리가 7년쯤 있는 셈이다. 응답자 상당수는 “회사에서 정년까지 버티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20, 30대 직장인들은 “정년을 채울 만큼 한 회사를 오래 다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지난달 제안한 국민동의청원의 결과로 이르면 11월 국회에서 정년을 65세까지 단계적으로 상향하는 입법 논의가 이뤄질 예정이다. 정부도 연말까지 고령자 계속고용제도 도입을 위한 로드맵을 마련할 계획이다.
비정부기구(NGO)에서 일하는 김모 씨(38)는 11년 동안 직장을 다섯 차례 옮긴 일명 ‘프로 이직러’다. 그는 처음 입사한 대기업을 제외하면 직장을 선택할 때 ‘정년 보장’ 여부를 따져본 적이 없다.
“회사가 나를 60세까지 책임져줄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어요. 어차피 정년을 채우기 힘들고, 정년을 보장해준다고 해도 그보다 훨씬 오래 살아야 하잖아요.” 김 씨의 목표는 자신만의 사업을 꾸리며 정년과 상관없이 일하는 것이다.
김 씨도 첫 직장을 고를 때는 정년 보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 회사를 오래 다니는 것보다 자신의 경력을 개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2년 만에 그만뒀다. 그는 “지금 다니는 회사는 40대 중반까지 다닐 수 있을 것 같다”며 “회사에서 계속 배움과 충분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면 정년까지 다녀도 좋겠지만 그게 가능한 회사가 많지는 않으니까”라고 말했다.
● 정년과 실제 퇴직 다른 ‘디커플링’ 심각
한국의 법정 정년은 60세지만 실제로는 그 전에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이 더 많다. 동아일보와 취업플랫폼 인크루트가 지난달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직장인들은 정년보다 6.9년 이른 ‘평균 53.1세’에 퇴직할 것으로 예상했다. 법정 정년과 상관없이 본인이 퇴직하고 싶은 나이는 20대 응답자가 평균 58세, 30대는 60.1세, 40대는 62.4세였다.
올해 6월 소규모 제약회사에서 퇴직한 최모 씨(47)는 재취업 자리를 찾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영업 경력을 살려 다시 취업하고 싶지만 제약업계 상황이 나빠 일단 업종 가리지 않고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최 씨는 “아직 애들도 어린데 아무래도 퇴직자는 재취업하면 예전보다 연봉이 크게 낮아질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어 “중소기업에는 아예 정년제도 자체가 없는 곳이 많아 정년 60세를 체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법정 정년과 실제 퇴직 나이의 괴리를 뜻하는 ‘정년 디커플링’ 현상은 통계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통계청이 매년 5월 조사하는 ‘경제활동인구 고령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올해 55∼64세 고령층이 가장 오래 다녔던 직장에서 퇴직한 연령은 평균 49.4세였다. 정년을 채우고 퇴직한 비율은 8.5%에 불과했다. 퇴직은 정년보다 빠른데 노후 준비가 부실한 탓에 60세 이후에도 계속 일하고 있거나, 일하기를 원하는 고령자가 대부분이다. 55∼79세 고령층이 일을 그만두길 원하는 나이는 평균 73세였다.
정년과 상관없이 오래 일할 수 있도록 전문 자격증을 따거나 창업을 준비하는 직장인도 많다. 서울시 산하 공기업에 다니는 이모 씨(32)는 틈틈이 노무사 시험 공부를 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내년 시험에 합격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다. 이 씨는 “마음만 먹으면 정년까지 버틸 수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성장하거나 배울 기회가 별로 없다”며 “기대수명이 길어져 어차피 60세 이후에도 일해야 하는데 전문 자격증이 있으면 정년과 무관하게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은 평생직장이 아닌 평생직업의 시대”라며 “직장과 상관없이 65세나 70세까지 일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 “정년 못 채워도 정년 연장은 필요”
한국의 고령화 속도가 빠르고 노인 빈곤 문제도 심각해지자 노동계는 국민연금 수령 나이에 맞춰 정년을 65세까지 단계적으로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5일 기자회견에서 “소득 크레바스, 질 낮은 고령 일자리, 노후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국회가 신속히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본보 설문조사에서도 직장인 응답자(1200명)의 71.2%(854명)는 정년을 65세까지 연장하는 방안에 찬성했다. 또 응답자의 76.1%(913명)는 ‘정년 연장이 자신의 실제 퇴직 연령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 정년 60세 이전에 퇴직할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법정 정년 연장에는 찬성한 것이다. 정년보다 빨리 퇴직해야 하는 현실이지만, 100세 시대에 맞춰 더 오래 일해야 하는 미래에 대비할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40대 직장인 박모 씨는 “법정 정년이 늘어나면 그에 맞춰 실제 퇴직도 조금이나마 늦어지고, 고령 근로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는 효과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 30대 응답자는 “공공기관과 대기업에서 먼저 시행하면 자연스럽게 정년을 65세로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라고 봤다.
특히 20, 30대 직장인들은 “내가 퇴직할 때까지 시간적 여유가 많아 65세 퇴직자 선례가 생기는 등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봤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모 씨(33)는 “직장인에게 정년은 일종의 보험 같아서 사용하지 못한다 해도 보험이 더 커지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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