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돌이 출신 편의점 사장입니다. 스물다섯이에요”[정양환의 요즘 (젊은)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21일 14시 00분


[11] 20대 편의점 사장 고선민 씨 (상)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11일 경북 김천시에 있는 CU김천평화주택점 앞에서 사장 고선민 씨(25)가 활짝 웃고 있다. 인터뷰가 처음인 그는 초반엔 다소 긴장해서 입가에 경련이 오기도 했다. 그래도 금방 적응한 뒤엔 그의 나긋나긋한 경상도 말투처럼 친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김천=정양환 기자 ray@donga.com
‘5만4200여 개.’

지난해 말 기준 국내 편의점 개수다. 숫자만 봐선 쉽게 감이 오질 않지만, ‘편의점 왕국’ 일본이 같은 시점 5만6000여 개. 심지어 일본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이나, 한국은 해마다 2000개 이상씩 늘고 있단다. 인구수나 땅 면적을 고려하면, 이미 우린 왕국을 뛰어넘어 제국이나 황국쯤 되는 셈이다.

거리를 걷다 보면 편의점 서너 개는 금방 눈에 들어오는 세상. 그만큼 편의점은 우리네 삶에 깊이 녹아들었다. ‘딸랑’(문 열고) ‘삑삑’(바코드 찍고) ‘띠링’(결재한 뒤) 다시 ‘딸랑.’ 가끔은 “어서오세요” “수고하세요”조차 생략된 풍경. 우리의 편의를 위한 이 공간을 우린 주로 무심하게 들렀다 간다.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서로의 손만 잠깐 바라보며.

허나 그곳에도 당연히, 사람들이 살아간다. 수많은 청년들이 ‘편돌이’ ‘편순이’라 낮잡아 불리며 묵묵히 일하고 있다. 경북 김천시에서 CU김천평화주택점을 운영하는 고선민 씨(25)도 그중 하나. 친형과 지금껏 모은 돈을 모두 투자해 지난해 드디어 ‘사장님’이 됐지만, 학창시절 때부터 편의점과 노래방 PC방 등에서 줄곧 알바 인생을 살아왔다. 그저 스쳐 지나갔지만, 실은 우리의 형제자매친구가 있는 곳. 편의점에서 고선민 씨를 만나봤다.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릴까요.
“안, 안녕하세요, 고선민입니다. 잠시만요, 너무 떨려서. 인터뷰는 처음이라…. 그래도 저희 편의점에서 만나니까 좀 낫긴 한데. 창고에서 뵙자고 해서 죄송해요. 저 혼자 있다 보니 자릴 비울 수 없어서. 휴, 다시 할게요. 저는 고선민이라고 합니다. 저란 사람은 목표가 뚜렷하고, 아니 목표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제가 가진 목표를 위해 사는…. 원래 활달한 성격인데, 요즘 좀 많이 진지해졌습니다.”

-신선한 소개네요. 보통 나이 직업 같은 걸 얘기하는데.
“아, 다시 할까요. 김천에서 나고 자란 스물다섯 살 남자입니다. 충북 영동에서 군 복무했을 때랑 서울 2개월 있었던 거 빼곤 줄곧 여기 살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계시고, 다섯 살 위인 형이 있고. 대학은 안 가서 고졸이고요. 2022년 8월 29일에 여기 오픈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고선민 씨. 키가 181cm인 그는 당시 68kg으로 피팅모델 알바를 했을 정도로 늘씬했다. 하지만 지난해 편의점 사장이 된 뒤 하루 13시간씩 일하며 편의점 음식만 먹다 보니 체중이 88kg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이 사진은 고 씨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그의 첫사랑이 찍어준 것이라고 한다. 사진제공 고선민 씨




-인터뷰 요청 듣고 의심했다면서요.
“네, 보이스피싱이나 사기꾼 아닐까…, 아, 면전에서 죄송합니다. 하여튼 절 취재한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잘 나가는 사람도 아니고. 내세울 만한 일을 한 것도 없고요. 근데 사람은 누구나 특별하다는 말씀에 용기를 냈습니다. 저 같은 수많은 편의점주와 직원들에게 응원을 전하고도 싶었고요. 우리 부자 될 수 있다, 힘내자….”

-활달했다고 했는데, 어릴 땐 어떤 아이였나요.
“좀 부끄러운데요. 초중학교 땐 인기가 좀 있었어요. 지금 봐선 믿기 힘드시죠? 어릴 땐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다른 학교에서 여학생들이 찾아오고 그랬습니다. 그 바람에 물정 모르고 막연히 탤런트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주위에서 괜히 띄워주니까 학교에도 장래희망으로 ‘배우’라고 써내곤 했습니다. 근데 여건이 안 돼서.”

-여건이 안 됐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부모님이 보시면 속상하실 수 있는데…, 실은 저희 형제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셨대요. 그 바람에 오랫동안 일을 못하셨어요. 지금은 다시 시작하셨지만, 계속 집안이 어려웠어요. 어머니도 스무 살에 결혼하셔서 딱히 경력도 없으신지라, 식당 주방 일 같은 걸 내내 하셨어요. 그러니 살림살이가 좋을 리 있겠어요. 저 중고교 때 한 달에 용돈 3만 원 받았어요. 대구나 김천에 있는 연기학원에 물어보니 학원비가 월 60~70만 원이라는데. 집에는 말도 못 꺼냈죠. 그래서 고2 때 몰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평일엔 학교 가니까 주말에 고깃집 서빙을 했습니다.”

-그걸로 학원비 댄 건가요.
“어데요. 주말 저녁 6시간씩 일하는데 턱도 없죠. 30만 원쯤 받았나…. 대구 있는 학원에 다녔다면 교통비로 다 나가죠. 그래서 고민 끝에, 김천의 한 극단에서 단원을 모집하단 소식을 듣고 찾아갔어요. 고생은 되더라도 기초부터 다질 수 있겠다 싶어서요. 다행히 받아주셔서 진짜 열심히 했습니다. 학교 마치면 곧장 극단에 가서 잡일 하고 연기 배우고. 입단 4개월 만인가 무대에도 섰어요. 대사 한 마디 없는 노비 1인가 2였지만, 하하. 근데 첫 공연이 끝난 뒤 그만뒀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고선민 씨의 첫 일자리인 고깃집 알바를 하던 당시. 알바를 하는 가게로 친구들이 찾아와 한 턱 쏘았다고 한다. 그는 꿈꾸던 연기가 하고 싶어 부모님 몰래 알바를 시작했다. 사진제공 고선민 씨




-왜 관둔 건가요.
“작은 역할이었지만, 무대에 서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연기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걸. 나름 보람 있긴 했지만, 준비 과정도 너무 힘들었고요. 진짜 배우가 되려면 그 정도는 이겨내야 하는데, 그럴 마음의 자세도 갖추지 못했던 거죠. 그냥 어쭙잖게, 배우는 유명해지면 돈 많이 버는 직업이란 환상만 있었어요. 게다가 첫 공연 뒤 분장을 못 지운 채 집에 가는 바람에 부모님한테 들켜서…. 이래저래 포기해버렸어요.”

-아쉽지 않았습니까.
“그때 방황을 많이 했어요. 오랫동안 품었던 꿈인데,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났으니까. 고깃집 알바도 얼마 안 가서 관뒀어요. 내년이면 고3이라 뭔가 제 길을 찾아야 하는데,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렇다고 공부를 하기엔 성적이 바닥이었고. 친구들은 대학이란 목표를 향해 가는데, 저만 홀로 멈춰선 기분이었어요. 그래서인지 괜히 집안 형편 나쁜 것에 대한 원망만 쌓여갔고요.”

-어떤 원망이었나요.
“알바 때도 그랬거든요. 주말에 친구들과 있다가도 저만 6시까지 가야 하니까, 기분이 그렇죠. 집이 좀 살았으면 연기학원도 편하게 다녔을 텐데 싶고. 공부도 변명이지만, 초6 때 수학학원 몇 달 다닌 게 전부거든요. 괜히 나도 남들처럼 학원 보내줬으면 공부했을 거란 부아도 치밀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했죠. 누구 탓할 시간에 제가 잘해야 하는 건데.”

-누구나 그럴 수 있죠.
“솔직히 저한테 가난은 어릴 때부터 익숙한 환경이었어요. 집도 방 2개짜리 임대아파트여서 제 방을 따로 가져본 적도 없고요. 항상 기초생활수급자였지만, 친구들도 내색하지 않고 잘 대해줬고요. (친구들이 어떻게 아나요) 당연히 알죠. 학교에서 방송을 해요. 고선민 어디어디로 오라고. 그럼 학습지 같은 걸 무료로 줘요. 그걸 이만큼 받아오면 애들 눈엔 이상한 거죠. 자기들은 돈 내고 사는 참고서를 왜 쟤는 학교에서 공짜로 주나. 금방 소문나죠.”

경북 김천에 있는 극단 ‘삼산인수’에서 노비 역할로 처음 무대에 오른 고선민 씨(오른쪽). 이후 배우의 꿈은 접었지만, 힘들었어도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사진제공 고선민 씨
경북 김천에 있는 극단 ‘삼산인수’에서 노비 역할로 처음 무대에 오른 고선민 씨(오른쪽). 이후 배우의 꿈은 접었지만, 힘들었어도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사진제공 고선민 씨




-대놓고 방송을 한단 말입니까.
“아마 애들이 눈치챌 수 있단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하셨던 거 같아요. 그걸로 서운하진 않았어요.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다 잘 해주셨거든요. 친구처럼 대해주시고, 공부 못 한다고 구박도 안 하셨고. 전 일찌감치 대학 포기해서 수능도 안 봤는데. 공부 말고도 다른 길이 있다면서 항상 응원해주셨어요.”

-그 다른 길은 뭐였나요.
“돈 버는 거죠. 대학 간 친구들은 빨라야 4년 뒤에 취업하잖아요. 걔들한테 뒤처지지 않으려면, 전 그 시간에 최대한 많이 벌어둬야죠. 돈 모아서 그때쯤부터는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 자금을 마련하겠단 계획이었죠. 특히 졸업 전후로 그런 생각이 컸어요. 실은…, 졸업식 때 부모님이 안 오셨어요. 당시에 사이도 안 좋으셨고, 일하시느라 바쁘셔서. 그땐 차라리 안 오는 게 낫다고도 생각했는데, 다른 애들처럼 같이 졸업식 사진 한 장 못 찍은 건 나중에 좀 아쉽더라고요.”

-왜 사이가 나쁘셨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돈 때문이죠. 그때그때 상황은 달랐어도, 결국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어요. 없는 살림에 애 둘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스트레스가 많으셨을 거예요. 형도 그런 상황을 힘들어했고. 전 그땐 될 대로 되라 식이었어요. 빨리 독립해서 내 살길이나 찾자 싶었죠. 제가 봐도 착한 아들은 아니었어요.”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네, 지금은 싸우지 않으세요. 계기가 있는데, 저 군대 있을 때 어머니가 한번 쓰러지셨어요. 휴가 나와 보니까 어머니 머리 스타일이 이상해서 여쭤봤더니 대충 얼버무리셨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당시엔 심각해서 검사받으시느라…. 다행히 큰 병은 아니었지만 부모님도 느끼신 바가 컸나 봐요. 이후론 싸울 상황을 피하세요. 이젠 형도 대학 졸업해 사회복지사가 됐고, 저도 제 앞가림 하니깐. 졸업한 뒤엔 거의 항상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고 투잡을 뛰었거든요.”

고선민 씨는 고교 3학년 겨울 12월 31일에 친구 4명과 함께 새해맞이 여행을 부산으로 갔다. 친구들과 김천을 벗어나 타지로 여행을 가본 건 그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사진제공 고선민 씨
고선민 씨는 고교 3학년 겨울 12월 31일에 친구 4명과 함께 새해맞이 여행을 부산으로 갔다. 친구들과 김천을 벗어나 타지로 여행을 가본 건 그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사진제공 고선민 씨




-주로 어떤 일이었습니까.
“졸업 전후 땐 노래방과 편의점 알바를 오래 했고요. 그때가 ‘편돌이’ 생활 시작이네요. 친구랑 순대 공장도 갔었는데, 거긴 이틀 만에 관뒀어요. 일도 일이지만 냄새를 도저히 못 버티겠더라고요. 형이 했던 PC방 알바도 물려받아 1년 정도 했고. 제가 2017년 7월 11일에 입대했는데, 제 생일 다음날이라 훈련소에서 케이크 줬던 게 기억나네요. 그때까진 쉬는 날도 없이 일했어요. 한 달에 한 번 쉴까 말까 했죠. 한 달에 120만 원에서 200만 원 정도 벌었는데, 매달 평균적으로 100만 원가량은 저축했어요.”

-진짜 아껴 써야 했겠네요.
“한 달을 10만 원으로 버틴 적도 많아요. 점심은 거의 굶다시피 했어요. 편의점 때는 보통 기한 지나 폐기하는 음식으로 때우고. 친구들이랑 어쩌다 술 한 잔 하는 것 말고는 쓴 데가 없어요. 군대에서도 월급 받은 거 고스란히 다 모았거든요. 제대할 때 1700만 원인가 모았어요. 당시 치아교정을 해야 해서 600만 원 정도 쓰고, 제 수중에 1100만 원쯤 남아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악착 같이 모았나요.
“말씀 드렸듯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였죠. 군대 때도 일반 소총수였는데 자원해서 취사병으로 갔어요. 요리를 배워두면 어떻게든 쓸모가 있겠구나 싶었거든요. 진짜 감자조림 하나 할 줄 모르는데, 선임들한테 혼나가며 노트에 깨알같이 요리법 써가며 배웠어요. 덕분에 지금은 웬만한 건 다 할 줄 알죠. 배워두길 잘한 게, 요즘 제가 꿈꾸는 일에 도움이 될 거 같아요.”

-하고 싶은 일이란 게….
“그때만 해도 명확치는 않았어요. 인터넷 개인방송 해보겠다고 장비를 500만 원 어치 마련해서 몇 달 하다가 반값에 팔아버린 적도 있고. 구체적이진 않아도, 장사를 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좀 되는대로 부딪혀보던 시절이었어요. 주위에선 진득하게 하는 게 없다고 뭐라 하는데. 그 말도 맞지만, 전 이런 게 다 제 ‘경험치’가 된다고 믿었어요. 연기도 인터넷방송도, 도전해봐야 내 길이 아닌 줄 아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편의점을 차린 건 다른 얘기죠. 형이랑 저의 전 재산이 들어갔으니까. 그전까진 모의 전투였다면, 이젠 진짜 전쟁에 뛰어든 거죠. 어떻게든 이기고 살아남아야 하는.”

(다음주 토요일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나의 옛날이야기] ‘요즘 (젊은) 것들’은 연재 글마다 청년들이 직접 고른 옛 사진들을 싣고자 합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며 그 시절을 들춰보는 ‘코너 속의 코너’입니다. 고선민 씨가 보내준 첫 번째 사진은 전역 뒤 잠시 서울에서 살 때 친구가 찍어준 뒷모습이라고 합니다. 당시 호텔 청소 알바 면접을 보고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라고 하는데요, 고 씨는 “왠지 모르게, 여러 많은 의미가 담긴 사진”으로 꼽았습니다. 사진제공 고선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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