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독도 지킨 민간외교가 ‘안용복’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27일 03시 00분


울릉도와 독도의 주권을 놓고 일본 측과 갈등이 심하게 불거진 건 임진왜란 이후입니다. 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의 통치력이 약해졌고, 그 틈을 노려 일본인들이 울릉도 일대에서 고기를 잡고 벌목하는 일들이 잦아졌기 때문입니다. 1613년(광해 6년)에는 조선 조정이 대마도주에게 이를 바로잡으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 두 차례나 왜(倭)국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답변을 에도 막부로부터 받아낸 사람이 있습니다.

안용복(?∼?·사진)은 동래(지금의 부산 동래구) 출신입니다. 좌수영 수군의 노 젓는 병사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출신 계급은 낮았던 걸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부산 왜관의 왜인들과 자주 접할 기회가 있어 일본어에 상당히 능통했고 통역까지 맡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1693년(숙종 19년)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던 안용복은 일본 어선들이 들어와 마음대로 활개 치는 걸 보고 분개해 항의하다 일본으로 잡혀갑니다. 끌려가서도 굽히지 않고 따져 호키슈 태수의 사과문까지 받아냅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주의 계략에 걸려 거꾸로 동래부에서 2년간 갇히게 됩니다.

이후 풀려난 안용복은 1696년 다시 울릉도로 출항합니다. 이때는 아예 일본과 한판 붙으려는 작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일본 어선과 시비가 붙었는데, 도망가는 그들을 끝까지 쫓아 일본까지 갑니다. 다시 호키슈 태수를 만난 안용복은 자신을 ‘울릉우산양도감세장’(세금을 관장하는 장군)이라고 칭하며 항의합니다. 이듬해 에도막부는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대마도주를 통해 일본인의 울릉도 조업 및 월경(越境)을 금지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으로 돌아온 안용복은 의금부로 보내집니다. 허가 없이 국경을 넘었고 관직(장군)을 사칭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무단으로 월경한 죄는 사형시킬 정도로 엄하게 다루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그래도 일본 정부로부터 확실하게 울릉도 영유권을 문서로 받아온 점은 모두 높이 샀습니다. 특히 남구만은 이 일을 두고 ‘역사적인 쾌거’라고 말했으며 성호 이익은 안용복을 ‘영웅호걸’이라고까지 칭합니다. 결국 안용복은 사형을 면하는 대신 귀양을 갑니다.

안용복에 대한 이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출신이 천민이었던지라 유배지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이후 조선 조정의 영토에 대한 영유권과 조업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울릉도 인근에 대한 감찰이 강화되었습니다. 일본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했고, 이후 일본 제국주의 팽창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울릉도 인근에 대한 영유권 문제는 불거지지 않았습니다.

25일은 ‘독도의 날’이었습니다. 관료도 사신도 왕족도 아니었던, 일개 천민이 그렇게까지 수호하려던 우리 영토의 동쪽 끝, 독도의 소중함을 떠올려 봅니다.

#독도#민간외교가#안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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