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빨대 규제 철회, ‘컵 보증금 시즌2’?…소매업장 관리 소홀해선 안돼[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10일 14시 00분


‘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 카페에 일회용 플라스틱컵과 종이컵이 쌓여 있다. 동아일보DB
어린아이들로부터 배울 때가 있다. 최근 일 중 기억에 남는 것 하나를 꼽으라면 ‘다회용 물통’에 관한 것이다.

기자의 아이들은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개인 다회용 물통을 가지고 다녔다. 학교에서도 내내 썼으니 초등학교 고학년인 10대인 첫째는 10년 넘게 개인 물통을 쓰고 있는 셈이다. 요새 어린이집, 학교 같은 기관에서 아이들은 대부분 개인 물통을 사용한다. 물통 들고 다니는 게 익숙해졌는지 아이들은 학교 갈 때뿐 아니라 학원, 나들이, 심지어 친구 집 갈 때도 개인 물통을 가지고 간다. 엄마 눈엔 아직 아기 같은 셋째가 제 팔뚝만 한 물통을 들고 나가는 모습이 안쓰러워 “귀찮겠다. 엄마가 돈 줄게, 그냥 음료수 사 먹어”라고 했더니, 아이는 되레 시큰둥하게 “이게 뭐가 귀찮아?” 했다.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이 에피소드가 다시 떠오른 건 일회용품 관련해 한 환경운동가를 취재하면서다. 인터뷰 며칠 전 강의 요청을 받아 한 초등학교에 갔다 왔다는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어른들이 다회용기 쓰기 힘들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학교 가니까 그 조그만 애들이 다 다회용 물통 들고 다니더라고요. 애들도 다 들고 다니는데 왜 어른이 못해요?”

세종, 제주에서 시행 중인 일회용 컵 보증금제를 설명한 안내문과 보증금 반환용 태그가 붙은 일회용 컵. 동아일보DB


● 다회용기 유도한다더니…종이컵·빨대 규제 철회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후 기자도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 휴대하기 좋은 접이식 실리콘 텀블러다. 솔직히 처음 가방에 넣을 때는 ‘며칠이나 들고 다닐까’ 했다. 하지만 막상 가지고 다녀 보니 환경단체 인사의 말처럼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물론 사용 후 씻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래도 다회용기 이용을 유도하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텀블러 할인을 해주는 곳이 많아서 10%가량 싸게 음료를 구입할 수 있었고, 더불어 쓰레기도 줄일 수 있으니 그 정도 노동은 별로 수고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일회용품 사용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불편해지면, 기자처럼 다회용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제법 늘어날 수 있겠다 싶었다. 많은 사람이 다회용기보다 일회용기를 선호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회용품을 쓰는 게 지금보다 불편해지고 비용까지 든다면?

최근 몇 년간 정부가 추진해 온 일회용품 대책의 핵심 방향이었다. 일회용품 사용을 불편하고 수고스럽게 하는 것. 일회용품을 사용하면 음료값을 더 비싸게 물리고(일회용 컵 보증금제), 식당 안에 있을 거면 플라스틱은 물론 종이컵과 플라스틱 빨대까지 일절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편의점에서는 비닐봉지를 주지 않는 식이다.

그런데 지난 7일 또 한 번 뒤통수를 때리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부가 이달 내 본격 시행하기로 했던 플라스틱 빨대, 종이컵 매장 내 사용 제한, 비닐봉지 판매 금지 조치를 무기한 연기 혹은 철회한다고 밝힌 것이다. 1년 계도기간을 거쳐 고작 시행을 보름여 앞둔 시점이었다.

컵가디언즈, 제주환경운동연합 등 환경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6월 제주도청 앞에서 제주 일회용컵 보증금제 캠페인 결과 발표 기자회견 후 보증금제 전국시행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제주=뉴스1


● ‘컵 보증금 유예 시즌2?’ 꼭 닮은 두 제도
전국 시행을 유예하더니 갑자기 세종, 제주에서만 축소 시행하게 된 ‘반의 반쪽짜리’ 일회용 컵 보증금제가 떠오른 건 비단 기자만이 아니었을 거다. 2020년 정부는 2008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일회용 컵 보증금제를 다시 부활시킨다고 밝혔다. 일회용 컵 보증금제란 일회용 컵 사용 시 일정 금액을 더 내고, 나중에 컵을 반환하면 그 돈을 돌려주는 제도다. 보증금을 부과함으로써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수거율도 높일 수 있다. 준비 기간을 거쳐 2022년 6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는데 정부가 바뀌고 얼마 안 된 2022년 5월 돌연 시행을 12월로 미뤘다. 그리고 그해 9월, 이번엔 세종과 제주에서만 ‘우선 시행’한다고 말을 바꿨다. 차차 전국으로 확산할 것이라더니 그 시점은 ‘최소 1년 이후’라는 먼 미래로 못 박았다. 1년여 지난 지금? 여전히 세종, 제주 외에 이 제도를 시행하는 곳은 없다.

얼마 전 번복된 일회용품 사용 규제는 마치 ‘일회용 컵 보증금제 시즌2’를 보는 느낌이다. 식당 안에서 플라스틱 컵뿐 아니라 플라스틱 빨대와 종이컵을 사용할 수 없고, 마트·편의점에서 비닐봉지를 유·무상 모두 제공할 수 없게 하는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 촉진에 관한 법률(자원재활용법)’ 시행규칙 개정안은 2021년 공포됐다. 본래 지난해 11월부터 시행하려 했지만, 소상공인들의 부담과 준비 기간을 이유로 1년 유예했다. 돌아오는 11월 24일이 시행일자였다. 그런데 7일 종이컵을 사용 제한 품목에서 제외하고, 플라스틱 빨대와 비닐봉지는 계도기간을 연장해 시행을 유예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빨대와 비닐봉지의 경우 ‘유예’이지만 또 구체적인 시점을 박지 않은 무기한 유예였다. 사실상 정책 철회나 다름없었다.

제주프랜차이즈점주협의회가 지난 4월 제주도의회 도민카페에서 일회용컵 보증금제 참여를 선언하고 있다. 당시 협의회는 형평성 해소를 위해 도내 전매장에 제도를 적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제주=뉴스1
제주프랜차이즈점주협의회가 지난 4월 제주도의회 도민카페에서 일회용컵 보증금제 참여를 선언하고 있다. 당시 협의회는 형평성 해소를 위해 도내 전매장에 제도를 적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제주=뉴스1
컵 보증금 때나 지금이나 소상공인들의 부담이 이유다. 하지만 업계의 반대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왜 이렇게 닥쳐서 철회한 것일까. 별다른 이슈나 사건 없이 갑자기 방향을 선회한 데 대해 내년 초로 다가온 ‘총선용 선심성’이라는 의혹이 불거졌다. 불과 1년 전 대책을 유예할 때까지만 해도 환경부는 ‘(계도기간이라도) 금지 사항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거나 ‘계도를 통해 제도를 안착시킬 계획’이라는 등 강한 시행 의지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컵 보증금 축소 시행 때도 당시 낮은 대통령 지지율 때문이라는 해석이 돌았다.

● 소매업장 관리 중요한데…
사실 식당과 같은 소매업종 일회용품 관리가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음식점, 편의점 등 소매업종 일회용품 쓰레기는 전체 쓰레기에서 미미한 비중을 차지한다.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커피 전문점 15개 브랜드와 패스트푸드점 5개 브랜드에서 사용한 일회용 컵은 10억3590만 개. 플라스틱 빨대와 젓는 막대 사용량은 2019년 기준 9억8900만 개로 추산된다. 언뜻 엄청난 양 같지만, 지난 4월 발표된 2021~2022년 전국폐기물통계조사에 따르면 생활폐기물 중 일회용품 쓰레기의 비중은 3.9%, 그중에서도 시장상가, 업무시설, 음식점 등 소규모 사업장에서 버리는 일회용품은 전체 일회용품의 62.4%였다. 음식업종과 마트·편의점 한두 업종에서 쓰는 일회용품으로 한정하면 그 비중은 더 줄어들 것이다. 이를 두고 정부가 저감 효과 대비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소매업종 규제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실생활에 맞닿아있는 공간에 대한 규제인 만큼 그 규제의 체감도가 높고 시민들의 생활과 인식에 끼치는 영향도 크다는 점이다. 매장 내 플라스틱 컵 규제의 경우 근래 그 어떤 정책보다도 더 일회용 플라스틱 문제를 환기하는 데 기여했고, 전 국민에 일회용품 저감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실생활에서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려는 노력은 미래의 저감으로도 이어진다. 앞서 물통 사례가 그 예다. 어려서부터 일회용품이 없는 삶에 익숙해지면 커서도 자연스레 일회용품을 덜 찾을 수밖에 없다.

서울 시내 한 카페에 플라스틱 빨대와 종이 홀더가 꽂혀있는 모습. 동아일보DB
서울 시내 한 카페에 플라스틱 빨대와 종이 홀더가 꽂혀있는 모습. 동아일보DB


● 매장서 일회용품 안 보이니 사용량 10~40%↓
지난해 기자는 서울 시내 한 카페를 섭외해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하루 동안 매장 안에서 플라스틱 빨대와 종이 홀더를 모조리 치워버렸다. 키오스크로 일회용 컵 주문도 할 수 없게 했다. 일회용 컵, 플라스틱 빨대와 종이 홀더를 쓰고 싶으면 반드시 매장 직원에게 요청해야 한다고 안내문을 붙였다. 쉽게 말해 일회용품을 쓰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자 단 하루 새 이들 일회용품 사용량이 10~40% 뚝 떨어졌다. 요청하면 준다고 안내했음에도 많은 손님이 그냥 다회용 컵으로, 플라스틱 빨대와 종이 홀더 없이 음료를 마셨다. 몇몇 시민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없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더라”, “딱히 필요 없는데 평소 습관적으로 집어 갔던 것 같다” 등의 답이 돌아왔다. 일회용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사람들은 생각보다 잘 적응했다. 매장의 일회용품 사용 문화가 사람들의 사용 습관에 긴밀하게 영향을 미침을 볼 수 있는 실험이었다.

● 실생활 작은 변화가 큰 저감 이끌어낼 수도
소매업종을 대상으로 한 일회용품 규제는 강제적이든 자율적이든 계속돼야 한다. 실효성 못지않게 캠페인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정책에서, 정부는 마치 한발 물러서는 듯한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텀블러데이 행사에 텀블러(개인컵)를 가져온 시민들이 커피차에서 음료를 받고 있다. 뉴스1
‘규제 합리화’라는 정부의 해명도 사실 미덥지 않다. 정부 설명대로 ‘감량 정책을 포기한 게 아니라 규제를 합리화’한 것이라면 종이컵 재활용률을 어떻게 높일 것인지, 플라스틱 빨대 규제는 언제까지 유예할지, 다회용기 활용 증진 방안은 무엇인지 구체적인 규제 대안을 함께 제시했어야 했다. 계도기간 1년, 시행규칙이 개정된 이후로 2년, 법안 준비 기간까지 합치면 수년의 시간이 있었다. 관련업종들과 이런 결론도 내지 못한 채 ‘추후 논의’, ‘시스템 마련’, ‘노력을 배가’와 같은 두루뭉술한 단어들로 점철된 보도자료를 냈다는 것은 정부가 안일했거나, 제도가 추진 동력을 잃었거나, 그도 아니면 세간의 의혹처럼 제도를 막판에 급선회한 것이라 해석할 수밖에 없다.

정부 방침에 따라 계도기간에도 이를 철저히 지킨 업장만 피해를 보게 된 점도 안타까운 부분이다. 이제 업계에는 ‘버티면 된다’, ‘규제 잘 지키는 사람만 손해’ 같은 인식이 확산할 것이다.

부디 정부가 구상하는 ‘자발적 참여 감량’, ‘재활용률 개선’이 실현되길 기원한다. 앞서 카페 실험에서 인터뷰한 한 손님은 “눈에 일회용품이 안 보이니 잘 안 쓰게 되더라”고 말했다. 일회용품을 줄이고 우리의 소비 습관을 바꾸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고도 작은 변화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저 어린이집과 학교에서 쓰라니까, 개인 물통을 쓰는 게 당연해진 우리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따라 텀블러를 들고 다니게 된 엄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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