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치료비 마련 위해 시작한 부업이 13년만에 본업으로
“시대 조류 읽으며 직업 바꿔야”
경부선 평택역에서 걸어서 4분, ‘착한남성컷’ 간판이 눈에 띈다. 지난해부터 조동근(63) 씨가 혼자 운영하는 이발소다. 메뉴는 크게 컷과 염색 두가지. 컷 7000원, 염색도 1만 원의 파격적 가격을 자랑한다. 대신 머리는 본인이 감아야 한다. 말 그대로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이 편하게 찾는 실용적 이발소다.
그는 안정된 직장으로 소문난 한국전력을 50세에 그만두고 반찬전문점 사장을 거쳐 이발소 사장님이 됐다. 그의 사연을 들으러 3일 경기도 평택시의 이발소를 찾았다.
20대 후반, 아내가 암 선고를 받았다
50세까지 그의 본업은 한국전력 직원이었다. 19세에 한전직업훈련소를 거쳐 기능직으로 입사했다. 소위 ‘전기원’이라 불리던, 철탑에 오르고 전봇대를 타며 고장을 고치는 그 일을 했다. 32세 때 회사 내 계열 전환 시험에 도전해 기술직 직원이 됐다.
연봉 높고 안정적인 직장으로 유명한 한전이지만 그는 미래가 불안했다. 일찌감치 결혼해 아들딸 낳고 잘 살던 아내가 그의 나이 29세에 비장암 선고를 받았다. 비장은 잘못 건드리면 출혈이 멈추지 않아 사망한다는 장기. 수술이 안 돼 항암치료에 희망을 걸었다.
“병명을 알기까지, 입원해서 두 달이 걸렸어요. 만 한 살, 네 살 된 아들딸을 친척 집에 맡기고 회사도 일시 휴직하고 아내 간병에 매달렸죠. 치료비에 가진 것 전부 쏟아붓고 일산의 외양간 같은 곳을 얻어 살았어요. 퇴원 후에는 집 앞 밭 200평을 얻어 온갖 작물을 길러 자연식을 아내에게 해 먹였지요.”
그의 나이 37세, 부인이 완치판정을 받았을 때 그는 거의 무일푼이 돼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아내의 병이 재발한다면, 그때는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더라구요. 제가 아내를 간병하는 와중에도 1년을 공부해 기술직에 도전한 것도 혹여 아내가 죽고 저마저 일하다가 사고로 죽으면 아이들이 고아가 될 수 있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반찬전문점으로 ‘대박’
돈을 벌기 위해 부업에 나섰다. 낮에는 한전에서 근무하고 밤이면 식당에서 일하며 보신탕집 오리로스구이 가든식당 김치공장 등 닥치는 대로 손댔지만 모두 실패했다. 식당은 그의 사정을 이해하는 직장 동료들의 회식 장소로 애용되곤 했다.
1997년 무렵, 5일장에 가서 김치를 팔던 그에게 어느 아주머니가 물었다. “다른 반찬은 없어요?” 섬광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반찬을 만들어 팔면 어떨까? 외식 장사도 사람들의 생활방식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걸 독서를 통해 알고 있었다. 외환위기( IMF)사태가 오면서 모든 사람이 일을 하는 시대가 왔다. 수요가 적지 않을 것 같았다.
상가 한구석에서 시작한 반찬가게는 시대 흐름과 맞아떨어져 ‘대박’을 쳤다. ‘명가 찬방’이란 간판을 달고 상가 전면으로 진출했고 매장은 세 군데로 늘었다.
성업의 배경에는 끊임없는 연구가 있었다. 그에게는 독서를 통해 얻은 새로운 반찬 레시피 아이디어가 가득했다. 예컨대 식재료를 포장해서 집에서 끓이기만 하면 되게 한 청국장, 부대찌개 등의 반응이 뜨거웠다. 요즘으로 치면 밀키트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오너는 그 제조과정을 다 알고 있어야 해요. 제가 직접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배웠어요. 명절 때 부침개 같은 건 정말 어마어마하게 팔렸어요. 3일간 매출이 3000만 원을 넘겼죠. 제가 직접 녹두 갈고 아주머니 10명이 종일 부치고….”
50세, 본업보다 부업 수입이 더 많아지자 그는 한전을 7년여 당겨 명예퇴직했다.
시대가 변해도 ‘진화’할 직업을 찾아
이 반찬가게를 그는 2015년까지 모두 접었다. 시대가 빠르게 변했고 반찬가게도 시류를 탔다. 1인 가구가 늘고 1인당 소득 3만 달러 시대가 되니 반찬을 사다 먹는 사람이 줄었다. 올라가는 인건비, 대기업들의 시장진출도 설 자리를 좁게 만들었다.
그는 노후 자신의 진로를 놓고 연구를 거듭했다. 다행히도 아내의 건강은 괜찮았고 아들딸 모두 가정을 이뤘다. 평생 먹고 살 것은 어느 정도 마련돼 있지만 스스로가 놀 수 없는 체질임을 알고 있었다. 세상과의 소통도 이어가야 했다. 바야흐로 세상은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이 지배하는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래서 찾은 게 이발인가요?
“이발, 설비, 중장비운전 등 몇가지를 놓고 검토했어요. 미래 직업을 △없어질 직업 △대체될 직업 △진화할 직업으로 분류해봤지요. 사람마다 두상이 다르고 모발 질도 다른데, 이 일은 기계가 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고령시대에 싸고 간편하게 이발할 곳을 찾는 수요도 늘어날 수밖에 없지요. 이용학원에 등록하고 6개월간은 마침 학원 위층에 있던 고시원에서 지내며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이발사는 어떻게 진화할 수 있을까. 그는 고령자가 더 늘어나면 출장 이발 수요도 증가할 거라고 보고 있다. 지금은 이발사가 가정을 방문해 이발해주는 것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
“퇴폐이발소에서 연상되는, 그런 우려 때문이겠죠. 그런데 직접 이발소에 오기 어려운 고령자들이 더 늘어나면 그에 맞게 법도 정비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나이가 많은 이발사들도 부담 없이 프리랜서처럼 일하는 시대가 열릴 수 있지요.”
나이 60에 이발사 자격증 따고 평택에 자리 잡아
어디에서 개업할 것인가. 자택이 있는 일산 일대를 검토했지만 신도시는 젊은이가 많다. 나이 든 이발사에게 젊은 손님이 오지 않으리라는 게 자명했다. 인구 밀도와 연령대 등을 따져 서울에서 멀지 않고 교통이 편리한 경기도 평택과 안성 구시가지를 노렸다. 고령자도 유동인구도 많아 틈새시장이 있다고 봤다.
그가 2019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안성에 ‘착한남성컷’ 1호점을 연 이유다.
“저는 어떤 머리라도 5~7분이면 다 깎습니다. 불필요한 동작을 모두 배제합니다. 패턴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평택에는 시니어층도 많지만 군부대도 많아 휴가 나온 군인들이 적잖게 찾아왔다. 이발소에는 음식점 메뉴처럼 머리모양 샘플 사진이 있고 고객은 그중 번호를 고르면 된다.
“평택에는 외국인 근로자도 많아요. 그분들이 머리 깎으러 와서 원하는 스타일을 설명하는 건 쉽지 않죠. 그림을 보며 번호를 고르게 하니 서로 편했어요.”
나아가 이 분야에서 일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멘토 역할을 자처했다.
“한사람 몫의 이용사가 되려면 1)자격증을 따고 2)실습 750여 시간을 거쳐 3)창업 혹은 취업하는 세 단계를 거쳐야 해요. 자격증은 학원에서, 창업 취업은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실습을 감당해줄 곳이 마땅치 않죠. 그걸 제가 돕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봉사활동과 기능연마 두 마리 토끼 잡아
그는 주말이면 ‘원데이 클래스’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매주 화요일이면 함께 이발 봉사를 나가 실습 기회를 만들어준다. 카카오톡에 ‘착한남성컷 학습방’을 만들어 수시로 일정과 정보를 공유하고 참고할 만한 지식을 전달해준다. 이 카톡방에는 현재 40명이 들어와 있다.
“인근 요양원이나 정신병원 등에 아침 9시부터 7~8명이 가서 100여 명 정도 이발해드립니다. 봉사는 그 자체로도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이발 기술이 숙련되는 좋은 기회예요. 이분들은 조금 밉게 깎아도 상관 않으시잖아요.
특히 고령 남성들은 대개 빡빡 밀어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제자들에게 이발 기계로 밀기 전에 상고머리 커트하는 연습을 해보라고 하지요. 연습용 가발 한 개에 7~8만 원인데, 절호의 기회죠.”
유튜브에 이 발기술 자료 영상을 80여 개 올렸는데, 이발을 공부하다가 이 영상을 발견하고 찾아오는 제자들이 간혹 있다. 그의 신조는 ‘최고보다 최초가 돼라’는 것. ‘크몽’이라는 전문가 등록 전자책 포털 사이트에 ‘이발의 정석’ 교재를 등록하고는 “남성헤어컷 분야 교재로는 최초”라며 자랑한다.
현재 ‘착한남성컷’은 전국에 5곳이 있다. 1호점이 자리가 잡히자 제자에게 넘기고 2호점을 평택 서정리에 열었다. 그 뒤 2호점도 다른 제자에게 넘기고 지난해 평택역에 둥지를 튼 게 지금의 3호점이다. 서울 봉천동과 광주광역시에도 50대, 60대 제자들이 ‘착한남성컷’을 열었다.
“1호점은 58세 전직 미용사가 맡았는데 센스가 좋아 성업 중이에요. 2호점은 60세 여성인데 거기도 잘 되지요. 3호점은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지는 못했지만 훗날 여길 근거지로 하려고 합니다.”
“사는데 대학은 그리 필요하지 않더라구요”
베이비붐 세대의 특징 중 하나가 극도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 또 그렇게 바닥에서 시작했어도 좌충우돌 부딪히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도약을 해낸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조 씨 또한 본인 표현에 따르면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는’ 가난한 집안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연탄 한 장 한 장 사다가 때우며 생활하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월사금 낼 돈이 없어 중퇴하고 인쇄소에 취직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공장을 전전하다 18세가 되자 ‘이렇게 살면 미래가 없겠구나’는 ‘현타’가 찾아왔고, 야학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한전 직업훈련소에 들어갔다.
1985년 첫 아이가 태어날 때 그는 검정고시 학원에 있었다. 그해 고입 검정에, 이듬해 대입 검정에 합격해 1987년 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2년 뒤 아내의 병으로 휴학하면서 그의 학업은 끝났다.
-왜 나중에라도 학업을 마치지 않으셨나요.
“사는데 대학이 그리 필요하지 않더라구요. 10년간 책을 2000권쯤 읽었어요. 특히 자기계발서에 빠져들었지요. 책 내용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늘 메모하고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봅니다. 나름 시대를 조금은 읽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학벌과는 상관없이 그는 지금도 열심히 공부한다. 음식 장사를 하던 시절에는 외식업 관련 책을 섭렵하고 어떻게 하면 성공할지 고민한 흔적들을 수첩에 빽빽이 남겼다. 반찬가게를 할 때도, 지금의 이발 일을 할 때도 늘 메모하고 읽고를 반복한다. 다만 요즘은 수첩이 아니라 스마트폰에 저장한다고.
“한국 청년 걱정되지만…앗! 내색은 안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청년들의 앞길도 열어주고 싶은데 청년세대에는 아직 그의 진심이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전철에서 젊은 아이들 보면 안타까워 죽겠어요. 그 귀한 시간을 시시한 게임이나 하며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막상 표정을 보면 세상에서 자기 역할을 찾지 못해 주눅 들어 있고요.”
화요일 봉사 모임에도 가끔 청년 이용사 지망생이 오는데 소통이 쉽지 않다.
“봉사 다녀오면 후기를 쓰라고 해도 안 써요. 하나라도 배우려는 자세가 잘 안 보여 답답합니다. 그래도 내색하면 ‘꼰대’가 되니까 참아야죠.”
-혹시 나이 든 멘토와 소통이 어색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저는요, 평생 세상에 들이댔어요. 제가 세상에 들이댄 것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저에게, 세상에게 들이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60세부터 아내는 가끔 만나는 게 반갑고 좋아요”
이 세상 많은 가장이 그러하듯 평생 그를 움직인 동력도 가족이었다. 아내가 투병하던 당시에는 어딜 가도 손을 붙잡고 다녔다. 암으로 인해 혈소판이 줄어 어딘가에 부딪히기만 해도 출혈이 멎지 않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주 1~2회 정도 일산에 올라가 만나는 정도로 쿨하게 지낸다. 자녀들은 다 출가했고 아들과 함께 사는 부인은 교회활동에 열심이라고. 조씨는 주로 평택에 얻은 오피스텔에서 생활한다. 그는 “60세 넘으면 부부는 가끔 만나는 게 제일 반갑고 좋다”며 웃는다.
“평생 일해 가족을 지켰습니다. 이제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죠. 이 일은 제가 세상과 만나는 창문 같은 겁니다. 인생 바꾸고 싶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이 일을 하길 정말 잘했죠. 아니었으면 세상에 조금이나마 도움 되고 싶은 이 마음을 전할 방법을 어디서 찾았을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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