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일부 업종에 한해 규제 완화”
적용 업종 등은 노사정 대화서 결정
한노총, 노사정 대화 5개월만에 복귀
정부가 현행 ‘주 52시간제’인 근로시간 제도를 일부 업종에 한해 완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13일 발표했다. 올해 3월 전체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을 발표했다가 ‘주 69시간’ 논란에 직면한 지 8개월 만에 내놓은 수정안이다. 하지만 세부 방안 마련을 노사정 대화에 떠넘겨 ‘맹탕’에 그쳤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날 고용노동부는 근로시간 관련 대국민 설문조사 결과와 제도 개선 방향을 발표했다. 고용부는 6월 말부터 약 두 달간 근로자 3839명, 사업주 976명, 일반 국민 1215명 등 60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에 응답한 근로자의 41.4%, 사업주의 38.2%는 현재 ‘주(週) 단위’인 연장근로 관리단위를 지금보다 확대하는 데 동의한다고 답했다. 고용부는 “제조업, 건설업 등의 업종과 연구·공학, 설치·정비·생산직, 보건·의료직 등의 직종에서 근로시간 유연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고용부는 근로시간 유연화가 필요한 업종과 직종에 한해 노사가 원하는 경우 현재 ‘주 12시간’인 연장근로 관리단위를 확대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떤 업종과 직종을 대상으로, 얼마나 연장근로 관리단위를 늘릴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발표에서 빠졌다. 고용부는 추후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통해 정한다고만 밝혔다. 이날 대통령실은 “근로시간 제도는 국민 생활,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만큼 일방적으로 추진할 수 없다”며 “노사 양측과 충분한 논의를 거치겠다”고 밝혔다.
8개월 만에 내놓은 정부의 보완책이 사실상 알맹이 없는 대책에 그친 데다 노사정 대화를 통한 논의도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날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대통령실의 요청에 따라 노사정 사회적 대화 기구인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5개월 만에 복귀하겠다고 전격 발표하면서도 근로시간 개편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한국노총은 “특정 시기에 주 52시간을 초과해 일할 필요가 있다면 현행법상 탄력근로시간제나 선택근로시간제를 활용하면 된다”며 개편에 반대했다.
제조-건설업, 주52시간 유연화 찬성 높아… “최대 주60시간 이내”
[근로시간제 개편] 일부 업종 노사, 규제 완화 공감대… 11시간 연속휴식 보장 하기로 정부, 구체 내용 없이 노사정에 넘겨 노사 이견 커 합의도출 쉽지 않을듯
정부가 현재 일주일 단위인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바꾸려 했던 이유는 산업현장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기업에 일이 몰릴 때 근로시간을 늘려 몰아서 일하고, 나중에 근로자들이 그만큼 몰아서 쉬도록 하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3월 발표 직후 초장시간 근로에 대한 우려로 반발 여론이 커지자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서 “주 60시간 이상 근무는 무리”라며 재검토를 지시했다. 이에 고용노동부는 필요한 업종과 직종에만 적용하는 ‘선별적 유연화’로 한발 물러선 개선 방향을 내놨다.
● 제조·건설업 등 “유연화 필요”
13일 고용부가 공개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일부 업종에 한해 근로시간을 유연화하는 방안에 근로자의 43.0%, 사업주의 47.5%, 일반 국민의 54.4%가 찬성했다. 자신이 속한 ‘업종’의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근로자와 사업주 모두 제조업(63.6%·65.4%), 건설업(55.5%·56.8%) 순으로 많았다. 자신이 속한 ‘직종’의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늘려야 한다고 답한 근로자 비율은 건설·채굴직, 연구·공학기술직에서 가장 높았다. 응답자들은 연장근로 관리단위를 확대하더라도 ‘월’ 단위까지만 확대하는 것을 선호했다. 기존 정부안은 ‘월’부터 ‘연’까지 확대가 가능했다.
만약 근로시간이 늘어날 경우 필요한 건강권 보호 조치에 대해서는 ‘주당 최대 근로시간 한도를 설정해야 한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11시간 연속 휴식 보장’이라는 답변이 다음으로 많았다. 주당 근로시간을 늘릴 경우 최대 근로시간을 얼마로 설정하는 게 적정할지에 대해서는 ‘주 60시간 이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를 토대로 고용부는 향후 최종 개편안을 내놓을 때 주당 근로시간 상한, 11시간 연속 휴식 보장 등의 건강권 보호 조치를 보장하기로 했다. 향후 특정 업종에 대해 연장근로 관리단위를 늘려주더라도 주 60시간 등의 상한을 설정할 가능성이 크다.
● 노사 견해차 커 대화 난항 예고
정부가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와 개편안에 노동계는 반발했다. 한국노총은 이날 성명에서 “정부는 일부 업종과 직종으로 제조업, 건설업, 설치·정비·생산직·기술직 등을 꼽았지만 이는 일부가 아닌 사실상 전부에 가깝다”며 반대의 뜻을 명확하게 밝혔다. 이어 “연장근로 단위기간 확대가 집중적인 장시간 노동에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국민을 우롱하는 식의 설문조사”라고 비판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도 “정부가 언급한 제조업과 건설업 등은 대표적인 장시간 노동 업종들”이라며 제도 개편 추진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경영계는 정부의 발표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반응이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3월 발표된 개편안에 못 미치는 내용이고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중소기업중앙회도 “주간 단위 연장근로로 겪는 어려움은 업종·직종에 관계없이 기업의 성장과 생존에 치명적인 위험 요소”라며 아쉬워했다. 노동계와 경영계의 인식에 간극이 커 노사정 대화로 합의점을 도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 구체안 없이 장기 표류 우려
일각에서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고용부가 여론을 의식해 구체적인 내용 없이 노사정 대화만 강조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찬반이 극렬하게 대립할 것이 뻔한 사안이기 때문에 굳이 선거를 앞두고 여론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로 인해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이 사실상 동력을 잃었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이날 이성희 고용부 차관은 노사정 대화 방식이나 최종 개편안이 나오는 시기 등에 대해 “결정된 바 없다”고 대답했다.
설문조사 결과 현재의 주 52시간제 때문에 업무 대응이 어렵다는 응답은 30% 안팎으로 예상보다 다소 낮게 나왔다. 그 때문에 현재의 근로시간 제도를 굳이 개편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존 정부안을 일방적으로 추진하지 않은 건 긍정적이지만 향후 논의가 제대로 이뤄질지가 관건”이라며 “근로자들의 부정적 인식이 여전하고 법을 개정할 부분도 많아 내년 총선 때 여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추진 동력을 상실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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