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금지-소음기준 준수 등 조건… 일주일 걸친 노숙집회 허용 처음
민노총, 인도에 천막 치고 농성
경찰 “무분별 시위에 잘못된 신호”… 전문가 “옥외집회 관련 법개정 시급”
15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
‘대통령의 거부권을 거부한다’는 문구가 새겨진 연두색 조끼를 입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공공운수 노조원 50여 명이 간이의자에 앉았다. 마이크를 잡은 노조 간부가 “민생폭탄 무능정권, 윤석열은 퇴직하라”는 구호를 외치자 함성이 쏟아졌다. 이어 가수가 등장해 노래를 불렀고 노조원들은 형광봉을 흔들며 호응했다.
오후 8시 반경 문화제를 마친 노조원들은 하나둘 텐트를 치며 전날에 이어 이틀째 노숙집회를 준비했다. 경찰이 금지한 도심 노숙집회가 전날 법원의 결정으로 허용됐기 때문인데 민노총은 20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노숙집회를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 경찰이 금지한 노숙집회, 법원이 허용
민노총은 이른바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이 9일 국회를 통과하자 11∼20일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막기 위한 노숙집회를 열겠다고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은 시민 불편과 소음 문제 등을 이유로 0시∼오전 6시에 한해 집회를 불허했다. 그러자 민노총은 서울행정법원에 종로경찰서장을 상대로 옥외집회 부분금지통고 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그리고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부장판사 김순열)는 “(부분금지통고 처분으로) 신청인이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을 우려가 있다”며 민노총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시민 불편을 고려해 △동화면세점 인도 부분으로 장소 한정 △참가 인원 100명 △음주 금지 △질서 유지인 10명 이상 △야간 및 심야시간대 확성기 등의 소음 기준 준수 의무 조건을 붙였다.
법원의 결정에 대해 경찰은 “하루 단위 노숙 집회가 허가된 적은 있지만 일주일에 걸쳐 진행되는 장기 노숙 집회를 허용한 건 처음”이라며 반발했다. 경찰 관계자는 “무분별한 집회 시위가 용납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했다.
법원의 허가에 따라 민노총은 14일 오후 9시 반부터 1인용 텐트 20여 개를 설치하고 농성 및 노숙집회를 진행했다. 15일에도 광화문 일대에서 게릴라 피켓시위와 문화제를 진행하는 등 집회를 이어가다 밤에 텐트를 쳤다. 텐트가 도심 거리를 점거한 상황에서 경찰의 집회 관리용 폴리스라인까지 더해지면서 시민들은 통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인근을 지나던 황모 씨(26)는 “사람들도 많이 지나다니는 곳인데 굳이 이곳에서, 그것도 며칠 동안 텐트까지 치며 길을 막아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 전문가 “옥외집회 법 공백, 조속히 개정해야”
경찰이 집회를 금지하면 법원이 허용하는 상황은 지난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반복되는 모습이다.
법원은 9월에도 민노총 금속노조의 밤샘집회를 음주 금지 등의 조건을 달아 허가했다. 5월에도 민노총 건설노조의 야간 행진을 허용했다. 다만 두 경우 모두 기간은 1박 2일이었다. 민노총은 올 5월에도 중구 시청광장 등에서 1박 2일 노숙집회를 하며 소음과 쓰레기 투기, 통행로 점거 등으로 물의를 빚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법률 규정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불합치 결정을 내린 후 아직 입법이 완료되지 않아 해당 규정은 사실상 공백 상태”라며 “이런 사태가 이어질 경우 시민들의 불편이 예상되는 만큼 관련 법 개정이 시급히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헌법에서 집회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농성하며 시민들에게 소음, 통행 문제로 불편을 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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