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전산망, 초유의 장시간 마비… 현장-온라인 발급 모두 중단
전국서 인감증명 등 서류 못 떼 부동산-금융 거래 차질 혼란
전국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민원을 처리할 때 사용하는 행정전산망 ‘새올’에 장애가 발생하고, 정부의 온라인 민원 서비스인 ‘정부24’(www.gov.kr)까지 전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주민등록등본이나 인감증명 등 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시청과 구청 등을 찾은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고, 전입신고를 제때 하지 못해 확정일자를 못 받는 등 부동산·금융 거래에도 차질이 생기며 피해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17일 오전 9시경 새올에 접속하는 행정전자서명 인증관리센터(GPKI) 시스템에 오류가 생겼다. 새올은 전국 지자체 공무원들이 업무를 볼 때 사용하는 행정전산망이다. 전국 시·군·구청이나 주민센터 공무원이 주민등록등·초본, 인감증명 등 민원 서류를 발급할 때 새올에 접속해 처리한다. 인터넷뱅킹에 접속하려면 공동인증서 등이 필요한 것처럼 공무원도 새올에 접속하려면 일종의 공인인증서인 GPKI 인증이 필요한데, 이 시스템에 장애가 발생하면서 민원서류 발급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시·군·구청과 주민센터는 오전 9시 업무 시작 직후부터 민원서류 발급 등에 차질을 빚었다. 낮 12시 전후 일부 시스템이 복구됐다가 다시 마비돼 이날 업무가 끝날 때까지 차질이 이어졌다.
행정전산망 마비 사실을 파악한 행안부는 “정부24를 통해 온라인으로 발급받으면 된다”고 안내했다. 하지만 접속자가 몰리면서 지연되던 정부24 역시 오후 1시 55분경 폐쇄됐다.
결국 온·오프라인 어디서도 민원서류를 발급받지 못하게 된 국민들은 주민센터 등에 거세게 항의했다. 정부 전산망을 통해 신분증 위조 여부를 확인하는 금융회사, 계약 시 건축물대장 등이 필요한 공인중개사사무소 등에서도 큰 혼란이 발생했다.
2002년 11월 전자정부가 출범한 이후 이처럼 장시간 동안 전산망이 마비된 건 처음이다. 지난해 유엔 전자정부 평가에서 193개국 중 3위를 차지한 성과를 내세우며 ‘디지털 플랫폼 정부’를 강조하던 정부에 대한 신뢰도 훼손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무 부처인 행안부가 “오전 중 복구될 것”이라고 했다가 번복하고 뒤늦게 대책을 내놓으며 혼란을 키웠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행안부는 이날 오전 8시 40분경 새올 전산망 장애를 처음 인지했다. 새올과 정부24의 서버와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은 장애를 인지한 후 네트워크 장비를 교체하고, 업체 직원과 공무원 수십 명을 투입했지만 전국의 공공기관이 문을 닫는 오후 6시까지 복구에 실패했다. 정부24 사이트도 오후 10시 반까지 복구되지 않으며 시스템 먹통은 13시간 이상 이어졌다.
● 행안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중 오류”
새올이 오전 9시경부터 접속 장애를 일으키면서 민원 처리가 지연되자 각 지자체 민원센터에선 국민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졌다.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행안부는 정부24에 접속해 온라인으로 민원 서류를 발급받으라고 안내했다. 가입자가 2000만여 명에 달하는 정부24를 이용하면 주민등록등본을 비롯해 취학통지서, 건강진단서 등을 모바일과 온라인으로 발급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접속자가 몰리면서 정부24마저 서비스가 느려졌고 행안부는 오후 1시 55분경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네트워크 장비 오류 등으로 서비스를 일시 중단한다”는 공지를 남긴 채 정부24를 폐쇄했다.
행안부는 전날 저녁 ‘스위치’의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는 과정에서 시스템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스위치는 네트워크 시스템 라우팅(경로 설정)을 통해 트래픽을 분산해 속도를 빠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행안부 관계자는 “스위치의 직접 영향을 받는 정부24와 GPKI가 장애를 일으키면서 GPKI를 활용하는 새올에도 접속 장애가 생겼다”며 “스위치를 원상복구하는 작업을 실시했지만 여전히 장애가 발생해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GPKI 장애로 새올 외에도 지방세 납세 시스템 등 공무원들이 업무에 활용하는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행안부의 설명에 대해 정보기술(IT) 전문가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시스템 구축 전문인 A사 관계자는 “스위치 서버는 라우터에 붙어 있기 때문에 서버가 다운돼 시스템이 꺼질 경우 다시 켜면 금방 문제가 해결된다”며 “여러 라우터가 한 번에 에러가 생겨 장시간 전국적인 장애를 일으켰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다른 IT업체 B사 관계자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다운됐을 때 과거 버전으로 바로 복구시킬 수 있는 백업 체계를 구축해 놓는 게 상식인데 행안부 설명은 이해가 잘 안 된다”고 했다.
정부는 일각에서 제기하는 해킹 의혹에 대해 선을 긋고 있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 관계자는 “해킹이 의심되려면 네트워크 트래픽 등에서 의심되는 징후가 보였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 행안부, “오전 중 복구” 자신했다가 번복
행안부의 안일한 대처가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행안부는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시스템이) 오전 중 복구될 것”이란 입장이었다. 하지만 정부24가 폐쇄된 후 “언제 복구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번복했다.
일선 지자체에도 시스템 장애 원인이나 복구 현황 등을 정확하게 공지하지 않았다. 한 서울 자치구 관계자는 “민원을 처리해 달라는 항의는 계속 들어오는데 정확히 언제 복구되는지, 장애가 있는 동안 처리하지 못한 업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사과하면서도 답답했다”고 말했다.
행안부는 오후 5시 40분경에야 보도자료를 내고 “전산장애로 인해 국민이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민센터에서 처리되는 납부, 신고 등 공공 민원은 장애가 복구돼 납부할 수 있게 되는 시점까지 납부 기한을 연장하기로 했다. 확정일자처럼 접수 즉시 처리해야 하는 민원은 민원실에서 수기로 접수한 이후 소급 처리한다.
대통령실은 이날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은 후 총력 대응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행안부에 “가용 인력과 장비를 총동원해 최대한 신속하게 복구를 완료하라”고 지시했다. 해외 출장 중인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조기에 귀국하기로 했다. 국가정보원은 “시스템 장애, 사이버 공격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전문 인력을 현장에 투입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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