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러시아 무인기(드론)의 대규모 공격으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의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기근 학살) 91주년 추모일이었습니다.
1924년 레닌이 죽고 권력을 쥔 스탈린(1879∼1953·사진)은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를 꿈꾸면서 근대적인 공업화와 산업화를 추진합니다. 당시 소련은 연이은 내전과 혁명으로 경제가 바닥을 치는 중이었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년)을 수립한 스탈린은 동시에 ‘집단농장’ 체제를 강제로 밀어붙이기 시작합니다. 뒤떨어진 농촌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산업화를 위한 대규모 식량 공출이 목적이었습니다. 1922년 소련에 강제 병합당한 우크라이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로부터 동유럽 최대의 곡창지대로 불리던 우크라이나는 전통적으로 개인이 농지를 소유하는 경우가 많았고 ‘쿨라크’라고 불리는 부농이 존재했습니다. 당연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민들의 생산 의욕이 떨어지고 수확량이 급격히 감소하자 우크라이나 당대회에서 스탈린 정책의 비효율성을 비판했지만, 스탈린은 힘으로 누르면서 대량 공출을 이어갔습니다. 농민들은 곡물을 구덩이에 묻거나 비밀창고에 숨기고, 공출을 거부하거나 도시로 탈출하는 등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문제는 스탈린이었습니다. 소련 각지에서 분리주의 민족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웠던 그는 이러한 저항을 민족주의 운동으로 바라봤습니다. 수색과 신문, 압수와 처벌이라는 가혹한 탄압이 뒤따랐습니다. 곡물을 숨기거나 공출을 피하는 자는 반혁명 반동분자로 몰아 강제 노역이나 사형에 처했습니다. 집단화에 반대하는 지식인, 정치인, 언론인들을 색출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국경은 폐쇄되었고, 식량 수송은 금지되었습니다.
드디어 농민들은 기르던 가축마저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뺏길 바에야 먼저 먹어 치우는 게 남는 거였습니다. 농사지을 가축이 없어지니 생산량은 더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공출량은 줄지 않았습니다. 곡물뿐만 아니라 종자까지 징발하는 바람에 1932년 가을부터는 굶어 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그대로 널브러진 채 뒹굴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에서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카자흐스탄, 그리고 인근 지역에서 최대 1000만 명 가까이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 유럽연합(EU)은 이를 집단 학살(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한편에서는 홀로도모르가 인위적인 기근(제노사이드)이 아닌 단지 스탈린의 정책 실패 및 가뭄이나 전염병 같은 자연적 요인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가혹한 통치로 인해 10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굶어 죽은 건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인류사의 비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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