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홀외고 2대 교장으로 정년퇴직
중졸 배고픈 소년공 시절 거쳐
27세에 막냇동생과 함께 고교 졸업
31년간 인천에서 교직에 헌신
“택시 창밖에 세상과 인생이 있더라”
“선생님, 안전하고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깔끔한 양복 정장에 나비넥타이, 왼쪽 가슴에는 명찰을 단 중년 기사님이 미소와 함께 이런 멘트를 날린다. 이 택시를 타면 5살 꼬마도 ‘선생님’이 된다. ‘제임스네네(JamesYes!Yes!) 택시’. 1956년생 정정호 씨가 인천에서 몰고 다니는 개인택시의 애칭이다.
2018년까지 그는 인천에서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미추홀외국어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졸 학력으로 영등포의 한 공장에서 일하는 배고픈 소년이었고, 이 소년은 27세에 7살 아래 막냇동생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에 진학해 영어 교사가 됐다.
그는 100세 카페 애독자다. 기사에 자신의 체험을 예로 들며 ‘퇴직 후에도 일을 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는 댓글을 성심껏 달아주곤 했다. 기자는 그 댓글에 들어 있는 나비넥타이, 인천, 개인택시 등을 단서로 무작위 검색을 통해 그의 블로그를 찾아냈다. 30일 그를 만나러 인천 남동구의 한 카페로 갔다.
학생들과 친구처럼 지낸 교장 선생님
정정호 씨와 인천과의 인연은 1987년 31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제물포고등학교로 발령받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인천에서 31년간 교직에 머물며 영어 교사, 장학사, 교감, 교장을 거쳤다.
정년퇴직 직전 3년 반 동안 교장으로 봉직한 미추홀외고는 2010년 인천 유일의 공립 외국어고로 개교했다. 당시 그가 인천시교육청에서 장학사로 일하며 설립을 이끌었고 2015년 2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교장 시절 그는 전교생 587명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한다.
“매일 교장실에서 사진첩 들고 애들 이름 외우곤 했지요. 왜 그랬냐고요? 제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학생들에게 절 부를 때는 ‘교장선생님’이라 하지 말고 ‘제임스’라고 부르라고 했지요.”
재미있는 것은 교장이 학생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다녔다는 점. 그가 보여주는 옛날 사진을 보니 의외로 잘 어울렸다.
“학생들이 무척 좋아했죠. 친구같이 지냈거든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택시 운전을 시작한 얼마 뒤 쓴 그의 블로그에는 ‘송도에서 택시 내부를 소독하고 있는데 뒤에서 “제임스, 멋져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추홀 외고 졸업생 000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우연히 만난 제자가 친구처럼 부담 없이 큰 소리로 부를 수 있는 그런 교장이었다는 얘기다.
―제임스라는 이름은?
“영어교사 하면서 제가 지었어요.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아시죠? 그처럼 교사도 만능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미추홀외고 학생들은 언제부턴가 학교 앞에 있는 커다란 호수를 ‘정정호’라 불렀다. 구글에서 학교 이름을 검색하면 이 호수에 대해 ‘정식 명칭은 해오름호수지만 재학생들은 전임 교장의 성함을 따서 정정호라고 부른다’는 구절이 나온다(더 위키).
본인은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2018년 8월 그의 퇴임일에 그의 의지와는 달리 점심시간에는 학생들이, 밤에는 학부모들이 깜짝 파티를 열어줬다는 대목에서 그의 인기도는 짐작할 수 있다. 퇴임 뒤에는 인천영어마을 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2년간 일했다.
10대 후반엔 소년공 생활, 4년 늦게 고등학교 입학
교사가 되기까지, 그는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1·4후퇴 때 신의주에서 맨몸으로 월남한 정 씨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 실향민들 사이에 ‘곧 통일이 된다’는 소문이 돌자 급히 서울 생활을 정리해 북한과 가까운 강원도 철원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기다리던 통일은 오지 않았고 슬하에 1녀 5남이 태어났다.
6남매 중 장남이던 정정호 소년은 빤한 형편에 차마 고등학교에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연년생 동생과 함께 상경해 영등포의 한 공장에 취직했다.
“저는 조립, 동생은 공작기계 선반을 했어요. 동생은 아직도 그 기술을 살려 일하고 있는데 다들 부러워하지요. 만일 펜대를 잡고 있었다면 66세인 지금 갈 데가 없겠죠. 그 1년 아래 동생도 역시 공장에 들어갔고 지금도 일합니다. 대형 펌프의 권위자예요.”
그는 3년 만에 공장일을 접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동기들보다 4년 늦었는데 재학 중 군복무를 한 탓에 졸업은 7년 늦어졌다.
“고교 3학년 10월에 군대 들어가서 3년 뒤 7월에 제대했어요. 저보다 7살 어린 막냇동생과 함께 졸업했지요. 같은 철원고를 다니다 보니 참 동네 창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소년공들의 월급이나마 가계에는 크게 도움이 됐다. 귀향을 포기하고 빚을 얻어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아들들이 적금을 타면 그 돈을 가져가 빚을 갚았다.
“그렇게 돈 번 덕에 제가 고등학교에 간 거죠. 저는 가계에는 크게 도움을 못 줬습니다. 둘째 셋째 동생들이 계속 일하면서 큰 기여를 해줬지요.”
두 동생은 그가 대학교에 들어가자 방송통신고에 지원해 졸업했다. 그 아래 동생들은 집안 살림이 나아진 덕에 제때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정말 고생들 많이 했지요. 꼰대 같은 얘기가 되지만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한 데는 이런 세대들이 역경에 맞서 뭔가를 이뤄낸 덕도 크다고 봅니다.”
퇴직한 해에 택시운전자격증 취득
택시운전 자격증은 교직에서 퇴임한 2018년에 땄다. 2021년부터 개인택시면허 양수요건이 대폭 완화돼 쉽게 면허를 얻게 됐다.
―교장 선생님은 사회적 체면을 중시할 자리인데, 어떻게 택시기사를 생각하셨나요.
“저는 사람은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라 하죠. 평소에도 ‘교장 옷을 벗으면 내가 교장이라는 생각은 잊어버리자’고 다짐했었습니다. 퇴직 후에는 남에게 서비스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서 호텔 웨이터도 생각했어요. 당시 지원서까지 보냈지만 답이 안 왔죠. 지금 보면 잘 됐어요. 택시운전이 더 자유롭고 좋아요.”
―가족의 반응은 어땠나요.
“집사람이 전적으로 찬성했어요. 자기도 면허증 있으면 택시 하고 싶대요.”
택시 운전을 준비하며 블로그도 시작했다. 블로그 첫 글이 2021년 2월 올린 ‘제임스 제4의 인생’이다.
그대로 옮기자면
●제1의 인생 영등포 철공장 유성공업 소년공 노동자 ●제2의 인생 미추홀 외고 교장을 마지막으로 한 교직 ●제3의 인생 인천영어마을 원장 ●제4의 인생 제임스네!네!택시 운전사
이렇게 딱 4줄이 올라와 있다.
―본격적인 글은 그해 7월부터 작성하셨는데 손님들 얘기를 간략하게 쓰셨더군요.
“다니다 보니 특이한 분을 많이 만나게 되는 거예요. 이건 기록을 해야겠다, 인생 공부를 할 수 있겠구나 싶었지요.”
‘과거를 내려놓는다’는 생각을 실천하고 있었던 걸까. 2년 이상 기록된 블로그에는 교장 시절 얘기는 거의 없었다. 직접 만나 인터뷰하며 옛날 사진들을 보여줄 때에야 그가 당시를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노년에 택시 운전은 하늘이 주신 직업
평소 시니어 개인택시 기사들의 일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정 씨가 마침 ‘택시 기사 해서 좋은 점 10가지’를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다.
● 1. 다양한 분을 만날 수 있다 ● 2. 운전대는 바로 내가 잡고 있다 ● 3. 자가용을 끌고 나가면 돈이 나가지만, 택시는 가지고 나가면 돈이 들어온다 ● 4. 치매 예방에 최고다 ● 5. 삼식이를 면할 수 있다(집안의 평화) ● 6. 맛집을 찾아 다니며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 7. 승객을 통해 나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 8. 노동의 신성함을 느끼게 해 준다 ● 9. 휴일의 맛을 만끽할 수 있다 ● 10. 삶의 시계는 멈추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 ※보너스 : 망할 일이 없다.
―‘망할 걱정이 없다’는 말이 와닿습니다.
“퇴직자가 창업하면 대부분 실패한다던데, 개인택시는 나중에 양도하면 살 때와 거의 비슷한 가격을 받거든요. 월세니 시설비, 직원 인건비도 필요 없죠. 망할 수가 없어요.”
10가지를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터. 그는 ‘세상 구경을 하며 배울 수 있다’는 점을 가장 강조했다. “택시의 작은 창을 통해 넓은 세상을 보는 거죠. 게다가 돈 받으면서 세상 구경 다니잖아요.”
―100세 카페에 퇴직 후에도 열심히 사는 분들의 얘기가 자주 나가는데, ‘뭘 굳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려 하느냐’는 댓글들이 종종 달립니다. 겪어본 분들은 일이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 당혹감을 많이 얘기하시던데….
“교장 모임 같은 곳에 가면 ‘그 나이 먹어서도 일하느냐’고 물어요. 저는 ‘수요일 일요일엔 쉰다’고 답하죠. 정주영 씨가 ‘임자 해봤어’라고 했다지만, 두려움은 바로 ‘해보지 않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결혼식장에서 만난 어느 명예퇴직 교사도 ‘어떻게 그걸 시작했느냐, 나는 발 들여놓기가 두렵다’고 하시더군요. 처음 하는 일들은 다 두렵죠. 하지만 그런 길을 가보는 것도 해볼 만한 일 아닌가요.”
그는 자신의 택시 이름에 들어간 ‘네!네!’의 뜻을 열심히 설명했다.
“고객의 모든 것에 긍정한다는 뜻이에요. 택시가 a에서 b로의 물리적 이동만이 아니라 심리적 공감의 장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사회가 참 살기 힘들죠. 승객이 무엇을 얘기하건 가치 판단을 하지 말고 무조건 공감을 하자. 그래서 ‘네네’입니다. 누가 무슨 얘기를 하든 ‘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며 긍정해드려요.”
“택시운전은 청년들의 선망 직종은 아니죠”
―공무원 연금 받으면서 또 돈 버느냐는 질타도 나올 듯합니다.
“제 경우 월 매출 200만 원이 목표예요. 비용 제하면 100만 원 남기는 정도죠. 아침 9시 반에 출근해 5시간 반만 일하고 주 2일은 쉽니다. 제 동생도 딸도 ‘젊은이들 일자리 뺏지 말고 조금만 하라고’ 해요. 다만 우리 사회가 은근히 분업화되고 있는데 택시기사는 청년들이 선망하는 일자리는 아니에요. 고령자들한테는 굉장히 좋은 일자리지만요. 그러니 젊은이 일자리 빼앗는다는 말은 하기 어렵게 돼 있어요.”
실제로 개인택시업계는 고령화됐고 법인택시는 기사 부족으로 가동률이 떨어져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비슷한 이력을 가진 분들이 계시다고요.
“2021년 양수조건이 완화되고 나서 인천에서 교장 출신으로는 제가 1호예요. 그 뒤 교장선생님 두 분과 명예퇴직한 교사 한 분이 택시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택시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
택시를 몰고 다니면 재미난 일들이 많다. 특히 그의 시선은 어려운 처지의 고령자들에게 자주 향한다.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편리함의 상징인 택시 앱 탓에 노인들이 힘들어졌다는 것.
“젊은이들은 집 앞에서 택시를 부르는데 노인들은 도로까지 나가 택시를 잡으려 애태우시죠. 그나마 빈 택시는 모두 ‘예약’이 걸려 있고요. 전 그런 어르신이 보이면 콜을 끄고 유턴을 해서라도 앞에 세워 드립니다. 무척 좋아하시죠.”
94세 할머니가 선풍기 파는 곳으로 가자고 해 상점에 내려드렸다가 결국 할머니 집 앞 거리에서 선풍기 조립까지 해드리고, 남동구청까지 가자며 택시를 탄 남루한 할아버지를 목적지에 내려드리며 택시비를 받는 대신 돌아갈 때도 택시로 가시라고 2만 원을 쥐여 드린 얘기 등 운전을 하지 않았다면 체험하지 못했을 에피소드가 많다.
물건 두고 내린 손님을 쫓아 추격전도 벌이고 손님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우기도 한다. 노부모님이 전 재산을 일찍 아들에게 주고 나서 오갈 데 없게 된 사연을 들으며 “재산은 미리 주면 안 되는 거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직접 택시 호출 앱을 사용하는 92세 할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인터넷뱅킹도 한다는 그 할머니가 ‘조금만 배우면 이렇게 편리한데 친구들이 그걸 못한다’라고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며 ‘변화하는 세상, 주도는 못 할지라도 따라는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꽃 피듯 살아온 인생, 꽃 지듯 살다 간 인생…
―택시 일은 언제까지 할 생각이세요?
“몇 살이라고 못 박기는 어렵지만 인지능력이나 운동감각이 떨어졌다고 느껴지면 바로 그만둬야죠. 저는 젊고 깔끔하게 보이려고 눈썹 그리고 비비크림 바르고 염색도 하고 다녀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인지능력은 당연히 떨어집니다. 본인은 모르더라도 객관적으로 인지능력이 떨어지면 그만둬야죠. 저만 타고 다니는 거라면 괜찮지만 소중한 생명이 타고 계신데….”
―택시를 그만두신 다음은요?
“집사람하고 언젠가는 ‘제임스네!네!카페’를 열자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안에 작은 심리 상담소도 두자고. 집사람이 심리상담사 자격증이 있거든요. 많은 시니어들이 속 얘기를 털어놓을 데가 없잖아요. 그런 자리를 좀 만들어보자. 오시는 분들에게 차 대접하고 그분들의 인생사도 들어주고…. 그런 생각을 해보고 있죠.”
30대 중후반에 들어선 두 자녀가 혼인한 지 몇 년 됐는데도 손주 소식이 없어 서운하지만, 그 기대또한 내려놓았다고.
그는 가수 MC 스나이퍼의 ‘인생’이란 노래를 말했다.
“중간에 여가수가 피처링하는 대사가 나와요. ‘꽃피듯 살아온 인생/ 꽃 지듯 살다 간 인생/ 돌아보니 아름다웠던 인생/ 이젠 미련이 없네.’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택시 하면서 차창 밖에 보이는 인생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 많이 보잖아요. 저런 평범한 사람들 덕분에 우리나라가 잘 돌아가는구나. 나의 들어 몸 아프신 분들, 그건 또 저의 미래잖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공부를 많이 합니다. 이게 택시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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