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북진 통일을 눈앞에 두고 미 10군단 전 병력은 흥남에서 해상을 통한 부산 철수를 결정합니다. 갑자기 참전한 중공군에 밀려 함흥 흥남 일대를 제외한 함경도 전체와 원산마저 점령당하면서 퇴로까지 끊겼기 때문입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북한 전역의 피란민들이 흥남부두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을 폭격하는 동안 흥남 철수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부두는 미군 작전선(LST)과 상선, 화물선 등 200여 척의 배에 올라타려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피란민들은 추위로 얼굴이 얼어 터지고 손발이 눈보라에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인파에 휩쓸려 부모 손을 놓치고 우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애초 미군 지휘부는 피란민을 함께 태우는 걸 꺼렸다고 합니다. 일단 수송선이 넉넉하지 않았고, 시간을 지체할수록 미군의 희생이 늘어나는 데다 결정적으로 피란민 사이에 스파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군 지휘관들의 극렬한 반대와 또 한 사람, 현봉학 씨(1922∼2007·사진)의 간절한 호소에 부딪힙니다.
함흥 출신으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버지니아주립대 의대를 수료한 현봉학은 전쟁이 터지자 곧바로 해군 장교로 자원합니다. 미 10군단 소속으로 흥남 전선에 투입된 그는, 의사보다는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통역관으로 중용되었습니다. 그런 현봉학의 눈에 부두의 피란민들은 놔두고 떠나면 그대로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현봉학은 자신의 뛰어난 통역 실력을 살려 당시 철수 작전을 이끌던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앨먼드 소장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끈질긴 현봉학의 설득에 앨먼드 소장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유엔군의 배가 피란민들을 싣고 먼저 떠나기 시작했고, 상선(商船)인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마지막으로 남았습니다. 남은 피란민들은 말 그대로 배에 꾸역꾸역 탔습니다.
갑판과 객실은 물론이고 엔진실과 선박 하단, 물탱크 입구에까지 사람들이 들어찼습니다. 앉는 건 고사하고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을 정도였습니다. 정원이 60명에 불과한 배에 1만4000명이 탄 겁니다.
1950년 12월 23일, 빅토리호가 부산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24일, 배 안의 사람들이 피로와 굶주림으로 초주검이 된 채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란민들이 넘쳐난다는 이유로 입항을 거절당합니다. 하는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 크리스마스인 25일, 마침내 거제도 장승포항에 내리게 됩니다. 그동안 몇 명이 죽었고, 5명의 아기가 배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쟁 중에 빅토리호가 부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건 보기 드문 행운이었습니다. 살아남겠다는 간절한 의지와 이들의 생존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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