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범에 처리비용 받기 힘들자
애꿎은 땅주인에 수억 원씩 부과… 최근 4년 54명에 337억 청구돼
토지압류 불이익속 법마련도 무산
전문가 “땅주인에 면책기회 줘야”
“저 같은 피해자가 계속 나오도록 방치하는 거 아닌가요.”
대구에 거주하는 문수용 씨(82)는 환경부가 추진하겠다고 밝혔던 ‘쓰레기산 피해자 방지법’이 무산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숨을 쉬며 이같이 말했다. 문 씨는 2019년 경북 경산시에 있는 자신의 땅에 쓰레기산이 생긴 후 경산시로부터 행정대집행 비용 약 5억 원을 내라는 명령을 받고 2년 넘게 소송을 진행 중이다.
정부가 올 초 “(문 씨 같은) 선의의 피해자를 막겠다”며 추진하던 폐기물관리법 개정이 무산된 것으로 동아일보 취재 결과 확인됐다. 이에 따라 폐기물 처리 비용이 애꿎은 땅 주인에게 부과되는 사태도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 환경부 “피해자방지법 추진 안 해”
현행 폐기물관리법은 쓰레기 투기범뿐 아니라 토지 소유자까지 폐기물 처리 명령 대상으로 규정해 같은 책임을 지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잡기도, 돈을 받아내기도 어려운 투기범 대신 비용을 청구하기 쉬운 땅 주인에게 구상금을 청구하는 일이 반복돼 왔다. 2019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땅 주인 54명에게 청구된 금액이 337억 원에 달한다.
지난해 12월 본보에서 이런 문제를 지적하자 올 2월 환경부는 “선의의 피해자를 막기 위해 각 지자체가 불법 폐기물 투기 사실을 제보받거나 확인한 경우 즉시 땅 주인에게 통보하도록 폐기물관리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 개정은 백지화됐다. 환경부 관계자는 27일 “투기가 얼마나 발생했을 때 누구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등의 내용을 구체화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그 대신 쓰레기산이 발생할 경우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땅 주인에게 알리라고 구두로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피해자들은 “언제 어떻게 알리라는 세부 기준이나 지침도 없이 막연히 알리라고 하는 게 실효성이 있겠느냐”는 입장이다.
문 씨의 경우 노점상 등을 하며 모은 돈으로 산 노후 대비용 땅을 2019년 4월 1일 손모 씨(63)에게 공장 부지로 빌려줬다.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한 걸 목격한 주민들이 경산시에 신고했지만 경산시 공무원은 구두 지도만 하고 돌아갔다. 이후 여러 차례 신고가 이어졌지만 경산시 측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문 씨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투기범 일당은 2019년 4월 15∼19일 집중적으로 약 3000t의 쓰레기를 투기한 후 잠적했다.
● 전문가 “무고한 땅 주인 면책 기회 줘야”
그러자 경산시는 문 씨에게 2020년 5월까지 폐기물을 처리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어 2020년 6월 행정대집행으로 쓰레기를 처리하며 비용 4억9051만 원을 청구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대해 국민권익위원회는 같은 해 “조치 명령을 재검토하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권익위는 “부득이하게 비용을 청구할 경우 경산시가 무단 투기를 인지하고도 행정조치를 소홀히 해 늘어난 쓰레기양을 감안해 액수를 정하라”고도 했다.
하지만 경산시는 권익위 의견에 강제성이 없다며 2021년 문 씨의 토지를 압류했다. 문 씨는 납부 명령을 취소해 달라며 행정소송을 냈지만 지난해 7월 패소했고, 경산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제기했지만 지난달 2심에서 법원은 경산시 손을 들어줬다.
항소심 재판부는 “경산시 측이 소극적으로 업무를 처리한 건 인정된다”면서도 “폐기물관리법에서 무단 투기를 적발한 공무원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쓰레기산 문제를 추적해 온 환경운동가 서봉태 씨는 “무고한 땅 주인에게 면책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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