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제 폐지를 선언한 지 정확히 100년 뒤 ‘검은 모세’로 추앙받으며 인종차별 철폐를 부르짖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틴 루서 킹(1929∼1968·사진) 목사입니다.
진보 신앙인으로 살던 킹 목사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흔든 건 ‘로자 파크스’ 사건입니다. 인종분리법이라는 악법이 서슬 퍼렇던 1955년, 로자 파크라는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자 흑인들은 ‘버스 안 타기 운동’을 시작합니다. 마침 같은 앨라배마주(州) 몽고메리 지역에서 침례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하던 킹 목사는 이 저항운동을 이끌게 됩니다. 그리고 1956년 ‘버스 내 인종분리법’이 위헌이라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끌어냈습니다.
이후 킹 목사는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CLC)를 결성하고, 흑인 인권운동을 펴 나가게 됩니다. 킹 목사는 평소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평화적인 투쟁을 주도했습니다. 1960년 애틀랜타에서 시작한 ‘앉기 운동’은 흑인 금지 구역에 가서 그냥 앉는 방식의 평화로운 싸움이었습니다. 투옥과 항소를 반복하면서 점차 여러 지역의 도서관이나 극장, 공공기관에서 공식적 인종차별이 사라지게 됩니다. 1963년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벌어진 항의시위에서 킹 목사 일행은 비폭력으로 맞섰지만 경찰은 폭력 과잉 진압으로 대응합니다. 그리고 이는 미국 전역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킹 목사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같은 해 8월, 킹 목사는 주요 인권조직 대표들과 함께 워싱턴을 행진했습니다. 인권법 승인, 공립학교 인종분리 금지, 고용에서 인종차별 금지, 모든 노동자의 최저 2달러 임금 보장 등의 주장을 내걸었습니다. 총 20만 명가량이 참가한 이 행진에서 킹 목사는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을 남겼습니다. 바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입니다. “네 명의 어린 자녀들이 언젠가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를 바랐던 킹 목사의 꿈은 지금도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킹 목사의 흑인 인권 운동은 반전 빈민 운동으로까지 확대돼 나갔지만 한편으로는 반대파를 자극하게 됩니다. 킹 목사는 결국 1968년 서른아홉의 나이로 극우파 백인단체 소속의 제임스 얼 레이의 총격에 암살당합니다. 하지만 암살 위협 속에서도 한평생 비폭력으로 맞섰던 킹 목사의 헌신 등으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은 서서히 개선돼 갔습니다.
킹 목사는 생전 오랜 인종차별의 억압에서 흑인들을 해방시켜 줄 지도자로 여겨졌습니다. 킹 목사가 죽은 뒤 미국은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서 킹 데이’로 지정하고 국경일로 삼아 그의 비폭력 저항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마틴 루서 킹 데이는 이달 15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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