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0개 단지 2만여채 전수조사
3개 단지 302채에만 스프링클러
주민들 대다수 소화기에만 의존
“거동 불편한데 대피 어쩌나 늘 불안”
“동생이 몸도 정신도 성치 않은데 불까지 덮치는 바람에….”
22일 오후 서울 강서구의 한 서울주택도시공사(SH) 영구임대 아파트 앞에서 취재팀과 만난 이모 씨(66)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맺지 못했다. 이 씨의 50대 동생은 전날 이 아파트 9층 자택에서 불이 나 온몸에 2도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갔다. 화재가 1시간 반가량 이어지며 다른 주민 1명도 연기를 들이마셨고, 총 45명이 대피했다. 불이 꺼진 지 하루가 꼬박 지났지만 아파트에선 탄내가 진동했다.
소방당국은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은 노후 아파트인 탓에 불이 빠르게 번졌고, 초기 진화도 어려웠다고 보고 있다. 이 아파트는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되기 전인 1992년 지어졌다. 이 씨 동생 자택을 포함한 단지 내 1998가구에 전부 스프링클러가 없다. 이 씨는 “동생이 30여 년 전 군대에서 얻은 대인기피증으로 정신장애를 지닌 데다 거동도 불편해 대피가 늦은 것 같다”고 말했다.
● 영구임대 아파트 98.7%에 스프링클러 없어
22일 취재팀이 서울 내 SH 영구임대 아파트 총 20개 단지 2만2672채를 각 관리사무소 등을 통해 전수조사한 결과, 스프링클러가 설치된 곳은 3개 단지 302채(1.3%)에 불과했다. 나머지 17개 단지 2만2370채(98.7%)는 소방법상 스프링클러 설비 관련 조항이 의무화된 1992년 7월 이전에 착공돼 스프링클러가 없었다. 임대료가 월 5만 원대로 저렴해 고령자와 장애인을 포함한 취약계층의 소중한 보금자리 역할을 하고 있지만, 화재에는 취약한 경우가 많은 것.
실제로 취재팀이 이날 서울 강서구와 강남구, 노원구의 영구임대 아파트 3개 단지를 방문해 소방시설 설치 여부를 확인해 본 결과, 주민 대다수는 오로지 소화기에 의존해 화재에 대비하고 있었다. 집에 설치된 화재 감지기와 경보기를 스프링클러로 잘못 알고 있는 주민도 많았다. 32년간 강남구의 한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거주한 강희경 씨(74)는 “우리 집에 스프링클러가 없는 줄 처음 알았다”며 “점점 다리도 안 좋아지는데 아래층에서 불이 나면 어떡하나 불안하다”고 말했다. 강 씨가 사는 이 복도식 아파트에는 층마다 고령자·장애인을 위한 전동휠체어와 보행보조기가 5, 6개씩 놓여 있었다.
18일 강서구 방화동의 한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도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 채모 씨(59)의 집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21년 전 고혈압으로 뇌병변 장애 2급을 얻은 채 씨는 21일 휠체어에 탄 채로 기자와 만나 “실수로 불이 나서 끄려 했지만 늦었다. 이웃들을 대피시키려 했지만 그것도 늦었다”면서 “나로 인해 고생한 주민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 화재 사망자 절반 이상이 고령자
영구임대 아파트에는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와 장애인의 거주 비율이 높아 화재 대피 등 대응이 어렵다. 이에 별도 화재 설비를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방청에 따르면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화재로 인해 사망한 893명(연령 미상 제외) 중 504명(56.4%)이 60대 이상이었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화재 대응 방법을 배울 기회가 드문 영구임대 주택 내 고령자와 장애인을 위해 소방안전관리자를 두고 관련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진 목원대 소방안전학부 교수는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재 스프레이를 비치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SH 관계자는 “노후 임대 아파트에 2020년 옥상 비상문 자동개폐장치와 2022년 피난유도표지를 각각 설치 완료했고, 앞으로도 정상 작동 여부 등을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