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객방치 벌금형’에 발묶인 파출소… “英처럼 ‘취객버스’ 만들자”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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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판결후 취객 더 챙기느라 분주
신고 늘어 파출소 업무 멈추기도
“중대범죄 대처 차질” 우려 목소리
전문가 “취객 보호시설 운영해야”

영국 런던에서 이동형 취객 보호소인 \'취객 버스(Booze Bus)\'에 탄 시민을 한 응급구조사가 살피고 있다. 영국은 취객이 치안 인력이나 응급실 병상을 낭비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축제나 연휴 기간에 취객 버스를 운영하고, 비용 일부는 국가보건서비스(NHS)에서 댄다. 영국 국가보건서비스 홈페이지 캡처
《만취자 수습에 발묶인 경찰… “英처럼 ‘취객 수용 버스’ 도입을”

치안의 최일선인 지구대와 파출소에서 ‘경찰’이 사라졌다. 취객을 집 앞까지만 데려다 준 경찰관들이 벌금형을 받은 뒤, 취객 안전 관리가 현장의 ‘최우선 업무’가 됐기 때문이다. 취객을 수습하느라 파출소를 셧다운(일시 업무 정지)하거나, 폭행사건 현장에 평소보다 적은 경찰 인력을 보내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치안 공백을 막기 위해 영국처럼 ‘취객 버스’를 도입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한파가 닥친 23일 오후 10시 반, 서울의 한 지구대에 112 신고가 접수됐다. ‘술 취한 남성이 길바닥에 누워 있는데, 얼어 죽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경찰관 4명이 순찰차 2대에 나눠 타고 출동해 취객을 데려왔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토사물에 기도가 막히지 않게 고개를 계속 돌려줘야 했다. 경찰관 2명은 2시간 동안 취객을 보살피느라 다른 일을 하지 못했다.

연일 한파가 이어지는 가운데, 안전사고를 우려한 지구대와 파출소의 일선 경찰들이 취객을 먼저 수습하면서 치안 공백 우려가 커지고 있다. 취객을 자택 문 앞까지만 데려다준 경찰관들이 최근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벌금형을 받은 영향인데, 근본책을 서두르지 않으면 자칫 중대범죄나 사고에 대처하는 데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취객 수습하느라 파출소 ‘셧다운’
20일 오전 1시 15분경 서대문구 A파출소는 불이 꺼지고 문이 잠긴 채였다. 취객을 수습하러 경찰관 2명이 출동했는데, 약 3분 만에 또 다른 신고가 들어와 남은 직원 2명마저 자리를 비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 파출소 반경 1km 내에는 다른 지구대나 파출소가 없다. 취객 1명 때문에 인근 주민 수만 명이 치안 공백에 내몰린 셈이다. 한 경찰관은 “최근 들어 취객 대응 때문에 파출소를 ‘셧다운’(일시 업무 정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일선에선 “취객 대응에 골머리를 앓긴 했지만 최근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난해 11월 강북경찰서 미아지구대 소속 경찰관 2명이 벌금 400만∼5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받고 나서 취객 대응이 강화됐다는 것. 이들은 만취한 A 씨를 자택 앞에만 데려다주고 들어가는 건 확인하지 않았다. A 씨는 문 앞에서 잠이 들었고 숨진 채 발견됐다. 법원은 경찰관 2명에게 사망에 이르게 방치한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유가족도 처벌을 원치 않는다며 탄원했지만, 업무상 과실치사죄는 피해자가 원치 않아도 사법 절차가 진행된다.

한 파출소 직원은 “해당 판결 이후 취객 1명을 수습하는 데 최소 40분씩 더 걸린다”고 호소했다. 범죄 혐의나 응급 증상이 없어도 순찰차에 태워 직접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한다. 서울 강남구의 한 파출소 직원은 “4명 이상 출동할 사건 사고 현장에 일단 2명만 보내고 나중에 지원을 요청한다. 폭행 사건은 막상 가보면 신고보다 상황이 심각해서 곤란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 “영국처럼 ‘취객 버스’ 운영 검토해야”
경찰청에 따르면 2022년 전체 112신고 1911만7453건 가운데 취객 관련이 97만6392건(5.1%)이었다. 2021년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등의 영향으로 해당 비율이 4.2%였지만, 방역 조치 완화 이후 다시 늘어나는 추세다.

취객은 응급실 병상과 의료인력의 낭비도 초래한다. 대다수 취객이 혹시 모를 응급 증상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응급실로 실려가기 때문이다. 예전엔 경찰서마다 ‘주취자안정실’이 있었지만 강제구금 등 논란 때문에 2009년에 전면 폐지됐다.

전문가들은 경찰과 119구급대, 지방자치단체, 병원 등이 협력해 취객 보호 시설을 운영하는 방안을 제언했다. 일본은 경찰서에, 호주는 지자체 위탁 시설에 각각 취객 보호 시설을 두고 있다. 프랑스는 취객이 응급실에 실려 가면 이송 비용을 당사자에게 물린다.

영국 보건당국은 2010년경부터 런던 등에서 응급구조사가 동승하는 이동형 취객 보호소인 ‘취객 버스(Booze Bus)’를 운영하고 있다. 취객을 태워 혈압 등을 측정해 응급실에 가야 하는지 판단하고, 증상이 없으면 귀가시킨다. 2018년경부턴 취객 버스 운영에 국가 건강보험 재정 30만 파운드(약 5억 원)가량도 투입하고 있다. 조윤주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지자체가 주도하고 소방, 의료기관, 복지기관 등이 참여하는 취객 보호시설을 권역마다 두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했다.

#취객방치 벌금형#파출소#취객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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