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들 수천명 집단 사직서
의료공백 현실화… 수술-진료 차질
정부 “병원 이탈땐 상응하는 처벌”
의협지도부 2명 면허정지 사전통지… 법무부-경찰 “주동자 구속수사”
전국 대형병원 전공의(인턴, 레지던트)들이 정부의 의대 입학정원 확대에 반발하며 19일 집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또 세브란스병원과 대전성모병원 등에선 전공의들이 이날부터 근무를 중단했다. 정부는 의료 공백 사태가 현실화되자 전국 전공의에게 ‘진료유지명령’을 내리고, 대한의사협회(의협) 지도부 2명에 대한 면허정지 절차에 착수했다. 또 전공의들에게 병원을 이탈할 경우 “상응하는 처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9일 의료계에 따르면 이날 빅5 병원(서울대, 세브란스, 서울아산, 삼성서울, 서울성모병원)을 비롯한 전국 병원에서 전공의 수천 명이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브란스병원의 경우 전공의 612명 중 600여 명이 사직서를 내고 소아청소년과 등 일부 과는 이날부터 병원을 떠났다. 삼성서울병원은 전공의 525명 중 160여 명, 서울성모병원은 290명 중 190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빅5 병원에서만 전공의 2745명 중 1000명 이상이 사직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복지부는 “병원을 떠나지 말라는 진료유지명령과 함께 병원을 이탈한 경우 문자메시지 등으로 업무개시명령을 전달했다. 그래도 복귀하지 않으면 법적 조치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공의 상당수는 예고한 대로 20일 오전 6시부터 근무를 중단한다는 방침이어서 의료대란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수도권 한 대학병원의 3년 차 외과 전공의는 “응급수술이 많은 신경외과나 중환자실 등은 일부 남아야 한다는 소수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병원을 같이 떠나기로 뜻을 모았다”고 했다. 대형병원들은 잡혀 있던 수술과 입원 일정을 속속 연기했다. 삼성서울병원 관계자는 “하루 200건가량 수술이 진행되는데 19일에 20건, 20일엔 70건가량이 연기됐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날 의료대란을 막기 위한 비상진료 대책을 발표했다. 대책에는 전국 12개 군병원 응급실을 민간에 개방하고 공공병원 진료 시간을 연장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또 상황이 심각해지면 현재 제한적으로 허용 중인 비대면 진료를 전면 허용하기로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의료는 국방이나 치안과 다름 없이 국민 생명과 건강에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고 한덕수 국무총리와의 주례 회동에선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대응에 만전을 기해 달라”고 지시했다. 또 복지부는 의협 지도부 2명에 대해 전공의 집단 사직을 부추겼다며 의사 면허정지를 위한 행정처분 사전통지서를 발송했다. 법무부와 경찰은 의료계 파업에 대해 주동자 구속 수사 등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반면 의협은 “(정부가) 잘못된 제도를 만들고 강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텅 빈 소아병동… “심장병 두살배기 딸 어쩌나” 아빠는 한숨만
[‘전공의 집단 사직’ 의료 혼란] 예정됐던 암수술도 갑자기 취소… 입원 환자들 퇴원 요구받기도 심전도실 진료 대기 평소 2배 일부 병원선 교수들이 당직 근무… “사태 장기화땐 버티기 힘들어”
1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어린이병원 1층 로비. 심실중격결손과 대동맥축착 등 심장질환을 앓는 두 살배기 딸을 둔 아버지 김모 씨(34)가 대기 공간에서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유모차에 태우고 있었다. 그는 “전공의 파업과 관련된 설명을 병원으로부터 자세히 듣지 못했다”며 “앞으로 딸의 진료가 어떻게 변동될지 알 수 없어 모든 게 너무 막연하고 불안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날 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파업이 시작된 것을 모른 채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이날까지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600여 명은 사직서를 냈고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등은 이날부터 병원을 떠났다.
김 씨의 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수술 등 치료를 받아 왔다. 아이가 아직 어리다 보니 언제 증상이 심해져 다시 입원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는 “파업이 계속된다면 딸의 입원이나 수술에 지장이 생길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전공의 파업 개시를 하루 앞둔 19일 일선 대학병원 곳곳에선 환자들의 불안감이 감지됐다.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내고 나간 자리를 메우고 있는 교수와 간호사 등은 열흘에서 2주가량 대체 근무표를 짜놨다. 하지만 파업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있어 의료 현장은 폭풍전야를 맞았다.
● “병원 30년 다녔지만 이런 적 처음”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심전도실 앞엔 진료를 기다리는 대기자가 40명을 웃돌았다. 30년째 이 병원을 다닌다는 순환기내과 환자 김명환 씨(77)는 “평소 7개 전부 운영되던 검사실이 현재 4개만 운영되고 있다”며 “평소엔 10∼20분만 기다리면 검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오늘은 이미 20분을 기다렸는데 2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충남 홍성군에 살지만 인근 병원에선 협심증 치료가 불가능해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왕복 5시간이 걸려 하룻밤을 묵고 이틀 일정으로 오간다. 김 씨는 “이렇게 오래 기다린 적은 처음”이라며 “20일에 잡혀 있는 진료마저 미뤄질까 불안하다”고 말했다.
2009년부터 암환우 온라인 커뮤니티 ‘아름다운 동행’을 운영해 온 최한중 대표는 “수술은 간병인까지 일정을 다 맞춰 두기 때문에 갑자기 취소되면 난감한 경우가 많은데 예정된 수술이 취소됐다는 피해 사례가 접수되고 있다”며 “현재 입원해 있는 환자들도 퇴원을 종용받고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수술이 연기돼 다른 병원을 찾고 있지만 난도가 높은 암 수술 특성상 대체할 수 있는 병원이 많지 않다고 한다.
폐암 4기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 있는 사진을 공개한 이건주 한국폐암환우회장은 이날 의사들을 향해 “최고의 지성과 명예를 갖춘 집단으로서 부족한 사회에 대한 관용도 보여 달라”며 “당국과 의협은 즉각 협상을 재개하고 서로 양보해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 남은 의료진 “장기화하면 못 버텨”
세브란스병원 이식외과는 마취통증의학과 인력이 부족해지자 이미 다음 주 수술을 절반으로 줄인 상태다. 한 이식외과 교수는 “신장 공여자와 스케줄을 미리 맞춘 건데 다 어그러지니까 조정하는 게 쉽지 않다”며 “간 이식 수술 중에서도 미뤄지면 생명이 위독할 환자 먼저 수술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교수는 “열흘 이상 의료 공백 사태가 장기화되면 교수들만으로는 버티기 힘들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은평성모병원도 16일부터 교수들이 당직을 서고 있다. 한 흉부외과 교수는 “밤새 환자 보고 당직 서고, 다음 날 외래 보고 수술까지 해야 하다 보니 하루 이틀이야 버티겠지만 기간이 길어지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는 말이 나온다”고 전했다. 가천대 길병원의 한 내과 교수는 “응급환자를 줄이거나 입원 환자나 수술을 줄이지 않으면 지금 인력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전공의 파업에 비대면 진료 및 진료보조(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간호협회 측은 정부의 PA 간호사 활용과 관련해 어떠한 협의도 없었다고 밝혔다. 현장에서 간호사 업무 범위와 관련된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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