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래: 조선시대 이긍익(李肯翊)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조선 초기 ‘방석(芳碩)의 변’(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 이성계는 정종(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가버렸습니다. 그 후 형제들을 살해하면서(2차 왕자의 난) 왕위를 차지한 태종(太宗) 이방원은 분노한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함흥으로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태조가 번번이 활을 쏘아 사신들을 죽이거나 가두고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유래한 ‘함흥차사(咸興差使)’는 심부름 간 사람이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 기록에는 함흥으로 보낸 차사 중 희생된 사람은 박순(朴淳)과 송유(松琉) 둘뿐이고 이들도 이성계가 죽인 게 아니라 조사의가 이끄는 반란군에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 생각거리: ‘함흥차사’는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성어입니다. 비슷한 말로는 끝내 소식이 없다는 뜻의 ‘종무소식(終無消息)’과 강원도는 산이 많고 험해 포수가 한 번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기 어렵다는 뜻의 ‘강원도포수(江原道砲手)’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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