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집 앞 큰길에서 있었던 일이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지갑과 휴대전화를 잃어버렸고, 집에 가야 하는데 버스와 전철이 끊겨 택시를 타야 하니 택시비를 좀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이 경기도라서 택시비가 몇만 원 나오고, 의심받을 상황이라는 건 아는데 자기는 절대 사기꾼이 아니고 진짜라고 강조했다. 빌려주면 꼭 보답할 거라고도 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지나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도와줄까, 아니면 그냥 돌아설까.
도움 빌미로 사기 치는 사람 있어
교과서에는 어려운 사람은 도와야 한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회 경험을 하고 나면 상대방이 어렵다고 해서 쉽게 돕게 되지가 않는다. 과거 여러 경험이 상기될 수밖에 없다. 내가 대학생 때였다.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30분 정도를 가야 하는 거리였는데, 정류장 앞에서 한 여자가 버스비가 없다고 도와달라고 했다. 버스비가 몇백 원 하던 시절이었고, 나에게는 지폐만 있었던 것 같다. 큰돈을 줄 수는 없으니 돈이 없다고 거절하고 도와주지 않았다. 그리고 끝이었다. 그 여자를 다시 볼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후 그 여자의 도움을 그냥 거절한 일이 잊히지 않았다. 큰돈도 아니고 버스비에 불과했는데 왜 도와주지 않았을까. 그 여자도 고민하다가 힘들게 부탁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걸 거절한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지금은 당시 미팅이나 소개팅을 한 여자들 얼굴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 버스비를 도와달라고 말하던 얼굴은 잊히지 않는다. 도와줬어야 했다. 후회가 남았고, 다음에 그런 일이 있으면 꼭 도와주자고 마음먹었다.
한참 시간이 지났고, 부산에 갔을 때였다. 부산역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러 이동하는데,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양복과 구두를 차려입고 서류 가방까지 들고 있어 완연한 직장인 모습이었다. 그는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야 하는데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돈이 없어 기차표를 끊지 못하고 있으니 기차표를 살 수 있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명함도 주면서 자기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며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또 서울에 도착하면 바로 돈을 갚겠다고, 계좌를 알려주면 바로 송금하겠다고도 했다. 대학생 때 경험 이후 이런 사람은 도와야 한다고 계속 생각해왔다. 그래서 기차표를 사주겠다고 했다. 단, 지금 현금이 없으니 카드로 결제해주겠다고 했다. 같이 매표소로 가 카드로 기차표를 사주겠다고. 그런데 이 말을 듣고 그 사람은 그냥 사라졌다. 서울에 가기 위해 기차표 살 돈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말해놓고, 현금을 주는 게 아니라 기차표를 직접 사준다고 하니 가버렸다. 그럼 자연스레 이 사람의 정체를 알 수밖에 없다. 그는 사기꾼이었다.
서울 강남 한 지하철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한 할아버지가 지하철비가 없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나이가 드신 분은 지하철비가 무료 아닌가.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자기가 아직 그 나이는 아니란다. 할아버지가 지하철비가 없어 어려워하면 도와야 한다. ‘요즘 지하철 값이 1000원은 넘으니, 2000원이면 충분하겠지’라 생각하고 2000원을 건넸다. 그런데 할아버지 말이 5000원은 있어야 한단다. 자기가 가야 하는 곳은 경기도 먼 곳이라서 지하철비가 그 정도 나온다는 것이다. ‘이걸 믿어야 해, 말아야 해’ 갈등이 밀려온다. 하지만 어쨌든 주기로 한 것이니 5000원을 건넸다.
이 할아버지도 사기꾼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좀 지나서 이 할아버지가 지하철역 안에서 다른 사람들한테 지하철비가 없다며 도와달라고 하는 모습을 봤다. 한 번이라면 진짜 지하철비가 없어 곤란했던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지하철역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사람이 이러고 있는 건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이 할아버지는 지하철비가 없다며 사기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누군가가 차비가 없다며 도와달라고 한 게 이 몇 번만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많다. 하지만 보통은 다 1000원, 2000원 정도면 된다. 그런데 앞 사례들은 5000원, 몇만 원 등 많은 금액을 요구했기에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차비가 없다며 돈을 달라는 경우는 대부분 사기였다. 진짜로 차비가 없어 곤란한 사람이 도와달라고 하는 경우보다 차비가 없다는 명목으로 돈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기당한 후 부정적 감정 강도 강해져
이런 경험들을 하고 나니 자신이 어렵다며 도와달라는 사람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렵구나, 도와야겠다’는 생각보다 ‘이거 사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먼저 든다. “사람은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한다” “여유 있는 사람은 돈이 없어 어려워하는 이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어려운 이들을 도우려면 진짜 어려운 이들만 도와달라는 말을 해야 한다. 어려운 이를 도와야 한다는 명목으로 사기를 치는 사람이 많으면 돕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다. 어려운 이들을 도왔을 때 느끼는 긍정적 만족감과 사기를 당했을 때 느끼는 부정적 언짢음을 비교하면 후자가 훨씬 강도가 세다. 사람들은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을 포기하더라도, 남한테 사기당하지 않는 것을 더 원한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자. 집 앞 거리에서 택시비를 빌려달라는 사람을 만났다. 옷은 깨끗하고, 말투도 점잖았다. 사기를 칠 사람 같지는 않다. 그런데 부산역에서 만난 그 남자도 양복을 쫙 빼입고 구두에 서류가방까지 들고 다녔다. 외모나 복장이 사기꾼과 보통 사람을 구별해주지는 않는다. 지금 택시비가 없으면 일단 택시를 잡아 탄 뒤 집에 도착해서 주면 되지 않나. 그런데 지갑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집에 간다고 돈, 카드가 나오는 건 아니란다. 그건 그럴 수도 있겠다. 이 사람은 진짜로 집에 갈 택시비가 필요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택시비 명목으로 돈을 빼내려는 사기꾼 둘 중 하나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리고 내 경험으로 볼 때 사기꾼일 확률이 높다. 그냥 돌아서는 게 답이다. 하지만 정말 이 사람이 집에 갈 차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경우라면 한밤중에 정말로 곤란한 처지에 놓일 것이다.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그려본다. 만약 이 남자가 사기꾼이라면? 그럴 확률이 높은데, 그때 손실은 나의 몇만 원이다. 만약 이 남자가 정말 어려운 처지에 놓인 거라면? 그럴 확률은 낮지만, 그때 나의 몇만 원은 이 사람에게 정말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기 상황이면 내가 몇만 원 손해 보는 거로 끝나고, 실제 상황이면 이 사람은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상황에서 벗어난다. 나의 손실보다 이 사람의 이익이 훨씬 크다. 나는 그 남자에게 택시비를 건넸다. 사기일 가능성이 크기는 하지만, 그래도 실제 상황일 수 있어서 택시비를 줬다. 상대방은 정말 고맙다며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 빌린 돈을 꼭 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연락처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됐다고 말하고 내 갈 길을 갔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힘든 사회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의인 행세를 하려던 건 아니다. 이름을 밝히며 돕는 것보다 익명으로 돕는 게 더 멋있어 보여서 그런 것도 아니다. 솔직한 내 심정은 이 사람이 사기꾼일 가능성이 더 큰 만큼 사기꾼에게 내 연락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이라면 정말 고마웠다며 돈을 돌려주겠다는 연락을 해오겠지만, 사기 상황이라면 오히려 연락처를 준 것 때문에 나중에 탈이 날 수도 있다. 그냥 여기서 모든 상황을 끝내는 게 낫고, 그래서 연락처를 주지 않았다.
택시비가 없어 집에 가지 못하던 사람을 도왔다. 그런데 마음이 즐겁거나 개운하지가 않다. 사기당한 거 아닌가라는 찝찝함이 더 크다. 사기당한 것일 테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게 진짜 상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가능성에 기대어 찝찝함을 달랜다. 그리고 생각한다. 어쩌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 됐을까. 서로 돕는 사회를 만들자고 떠들지만, 막상 남을 도우면 사기당한 거 아닌가라는 찝찝한 기분이 든다. 누군가 도움을 청해올 때 이런 감정이 들어서는 도울 수가 없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좋은 사회를 만들려면 먼저 사기가 만연하지 않는 신뢰 사회가 돼야 한다. 사기꾼이 득세하는 사회에서는 어려움에 처함 다른 사람들을 돕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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