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과 관련해 2046쪽 분량의 항소이유서를 법원에 제출하면서 “오로지 피고인들의 무죄를 위해 헌신했다”고 1심 재판부를 강하게 비판한 것으로 확인됐다. 1심 판결이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 결과란 취지다.
8일 동아일보가 입수한 항소이유서에 따르면 검찰은 ‘행정부 상대 이익도모’ ‘입법부 및 헌법재판소 상대 이익도모와 위상강화’ ‘대내외적 비판세력탄압 ’ 등 8개 부분에 걸쳐 이렇게 반박한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올해 1월 26일 1심 선고 뒤 불복의사를 밝히고 지난달 22일 항소이유서를 서울고법 형사14-1부(재판장 박혜선)에 제출했다. ● 1심 재판부 작심 비판한 검찰
검찰은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을 대하는 법원의 태도’라는 목차를 별도로 마련해 1심 재판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검찰은 “원심의 판결을 관통하는 하나의 기조가 있다”며 “법원, 사법부는 완전무결한 집단이며 법관은 고고하고 결점이 없는 존재이기에 검사가 어떤 주장을 하고 어떤 증거를 제출해도 공소사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인식이 (1심 판결에) 깔려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기조에 따라 원심은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해주기 위해 똑같은 내용과 논리를 반복했고, 그 결과 판결문의 양만 불필요하게 늘어났다”고 주장했다.
1심의 ‘전부 무죄’ 결론이 법원의 ‘제식구 감싸기’ 결과물이란 취지의 주장도 펼쳤다. 검찰은 “(1심 재판부가) 법과 양심이 아닌 온정주의·조직이기주의에 따라 재판을 진행해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며 “처음부터 공정한 재판을 진행할 자신이 없었고 이러한 판결로 역사에 오점을 남길 바에는 차라리 재판을 끌다가 다음 재판부에 넘기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1심 재판부가 검찰이 수집한 증거들을 부당하게 무시했고, 참고인과 증인으로 수사 및 재판 과정에 참여한 일부 법관들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주장도 내놨다. 검찰은 “원심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증거들만 취사선택했고, 변호인들이 주장하지도 않은 논리까지 스스로 개발하면서 오로지 피고인들의 무죄를 위해 헌신했다”고 주장했다.
양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의혹으로 기소된 법관들에 대해서도 검찰은 “수사와 재판에서 보인 관련자들의 행태는 속칭 ‘법꾸라지’들의 향연이었다”고 비판했다.
● 檢, 항소심서 “월권적 직권남용” 입증 주력할 듯
검찰은 항소심 재판에서 양 전 대법원장 등의 행위가 ‘월권적 직권남용’ 이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직무 권한이 없더라도 이를 월권해 행사했다면 역시 ‘직권 남용’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직권이 없어 남용할 권리도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 1심 판단보다 직권남용죄의 적용 범위를 넓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검찰은 항소이유서에서 “대법원은 공무원이 자신의 권한 범위를 넘어 금지된 행위를 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직무수행의 공적명분 하에 직무의 기회와 장소 직무수행의 방법과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등의 사정으로 인해 직무에 가탁한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그와 같은 월권행위 역시 직권남용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법리를 확립해 두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와 관련해 해군 법무실장이 국방부 감찰단에 수사기밀을 보고하도록 요구해 ‘직권남용’이 인정된 2011년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기도 했다. 검찰은 “피고인들의 행위는 오로지 사적인 행위이거나 단순히 지위의 영향력을 이용한 행위가 아니라 사법행정권이라는 직권을 남용한 행위”라고 덧붙였다.
검찰은 이처럼 법리 적용 범위를 넓히면 재판개입 및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 등 핵심 범죄사실이 유죄로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재판 개입’과 관련해 “김용덕 전 대법관이 주심으로 지정된 뒤 (양 전 대법원장이) 해당 사건의 재검토 필요성 등을 언급했다”며 “재판권 행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직권남용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검찰은 “다수의 문건, 피고인들의 지위 등에 비추어 보면 원심 판단과 달리 실제로 재판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넉넉히 인정된다”고 말했다. 특정 법관들에게 인사 상 불이익을 주었다는 ‘물의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 혐의에 대해서도 “해당 문건은 제목과 내용 자체로 문책성 인사를 가하기 위한 목적이 명백해 직권남용죄가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검찰의 항소이유서에 대해 법원에선 “검찰이 법리 다툼은 하지 않고 변죽만 울리고 있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 부장판사는 “검찰이 자신이 없으니 변죽만 울린 것”이라며 “그 많은 범죄사실이 무죄면, 철저하게 완성도 높은 법리 다툼을 해야지 재판부 탓을 하는 건 자신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항소이유서에서 감정적 표현을 담아 원심 재판부를 비판하는 것은 이례적”이라며 “2심 재판부가 1심 결과에 대한 예단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 측은 “2심 재판을 앞두고 있어 말을 아낄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 재판에 임할 것”이라고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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