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영 전북 군산의료원 외과 과장(70)은 2005~2010년 아주대의료원장을 지낸 시니어 의사다. 그는 “새 도전을 하겠다”며 올 초 고향인 전북 익산시로 내려가 군산의료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소 과장은 “시니어 의사들이 (낯선 지역에서도) 사명감을 갖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올 2월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병원 이탈이 장기화되고 지역 보건소 등에서 일하던 공중보건의(공보의)가 대형병원으로 파견되면서 정년(만 65세) 후 대형병원을 퇴직한 시니어 의사들이 의료공백을 메우는 지역이 늘고 있다. 이들은 “정년 후 봉사할 곳이 있어 감사하다”면서도 “의료 격차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동아일보는 17, 18일 ‘의료 취약지’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시니어 의사 4명을 인터뷰했다.
●심각한 의료격차, ‘일당백’ 돼야 하는 의사들
시니어 의사들은 지방에 와서 ‘의료격차’를 피부로 느끼게 됐다고 했다. 일산차병원 진료부원장을 지낸 신승주 강원 양양보건소장(69)은 양양군수의 ‘러브콜’을 받고 지난해 4월 부임했다. 신 소장은 “양양군에는 시설과 장비가 부족해 신생아를 받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분만은 강릉시의 대학병원으로 연계하고 있다”며 “같은 국민인데 받을 수 있는 의료서비스의 질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게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또 “이 지역 할머니 중에는 태어나 처음 산부인과 초음파를 해본 분도 있더라”고 했다.
인력과 장비, 시설이 갖춰져 있던 서울과 달리 지방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해 의사들이 ‘일당 백’이 돼야 한다. 소 과장은 진료보조(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 한 명의 도움을 받으며 일주일에 2~3번의 수술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모든 검사와 기록을 직접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환자 한 분을 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말했다.
의료 인력이 충분치 않다 보니 여러 과를 동시에 보는 경우도 흔하다. 중앙대병원 외과 과장을 지낸 지경천 강원 정선군립병원장(67)은 ‘고향으로 돌아와 베풀며 살라’는 어머니의 유지에 따라 지난해 3월 귀향했다. 지 원장은 외과 전문의지만 의료 인력이 부족한 탓에 소아청소년과, 내과 진료도 함께 보고 있다. 그는 “정선군립병원은 4개 과에 의사가 한 명 씩밖에 없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힘든 여건에도 보람 느끼는 순간들
수도권보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환자들을 돌보며 보람을 느끼고 있다. 국내 뇌졸중 분야 권위자이자 2019년 아산의학상 수상자인 김종성 강릉아산병원 신경과 교수(68)는 ‘신경과 의사가 갑자기 나가서 너무 힘들다’는 제자의 요청에 34년간 근무했던 서울아산병원을 떠나 2022년 11월 강릉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는 “서울에서는 한 환자를 길게 보기 어려워 중요한 것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선 환자를 좀 더 친절하고 따뜻하게 오래 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3차 의료기관이 없는 군산에는 소 과장이 부임하기 전까지 갑상선암 및 유방암 수술이 가능한 의사가 없었다. 소 과장은 “갑상선암 환자가 수술하고 와서 ‘서울에 가야 하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감사하다’고 인사하시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지 원장은 “담도 폐쇄로 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서울 병원에 연계했는데, 그 환자가 한 달 만에 나아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러 오셨다”며 이때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의료취약지-시니어 의사 매칭 지원
인터뷰에 응한 의사들은 수도권과 지방의 의료 격차를 줄이는 방안 중 하나로 시니어 의사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지난해 12월 기준 50세 이상 79세 이하 의사 중 활동하지 않는 의사는 약 4166명으로, 이들은 은퇴 후 일하고 싶다는 의지가 높다. 실제 지난해 의협신문 설문에서 60대 이상 의사의 84.7%가 ‘은퇴 후 진료’를 희망했다. 공공보건기관 취업 희망 의향은 83.2%, 의료 취약지 근무 의향도 70.1%로 높게 나타났다.
이들은 시니어 의사들이 지방에 정착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지방자치단체도 관련 투자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미국 메이요 클리닉은 인구 12만 명인 작은 도시에 있지만 뛰어난 연구 능력으로 우수한 인력이 모인다”며 “국내 지방병원들이 연구를 통해 특화한다면 의사들이 서울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은퇴한 교수들이 지방에 오면 환자들이 그를 믿고 다른 지역으로 가지 않을 수 있다”고 밝혔다. 소 과장은 “공공병원 수입만으로 투자에 나서기 쉽지 않은 만큼, 정부·지자체에서 지역 의료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16일 국립중앙의료원에 시니어 의사 지원센터를 열고 지방 의료기관과 시니어 의사 매칭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센터는 의사와 기관으로부터 받은 문의를 바탕으로 이들이 희망하는 근무 조건, 연봉 등을 맞춰볼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할 예정이다. 하반기부터는 지역 의료 현장 등에서 각종 술기와 전자의무기록(EMR) 기입 방법 등을 교육한다. ‘일당 백’을 요구받는 지역 의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이다. 오영아 센터장은 “센터는 의료계와 현장의 가교 역할을 할 것”라며 “절대적인 숫자도 중요하지만, 한 분이라도 정성스럽게 근무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것이 센터의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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