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원전 유치 지원금 1279억, 주민 갈등속 10년째 ‘방치’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30일 03시 00분


주민단체 주도권 다툼에 소송전
화폐가치 하락으로 276억 ‘증발’

울산 울주군 서생면 주민들이 자율 유치한 새울 원전 3호기와 4호기가 건립 중인 모습. 8500명이 거주하는 서생면 주민들은 침체한 지역 경제를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이곳에 원전 2기를 2014년 자율 유치했지만 지원금 1500억 원을 놓고 갈등이 불거져 10년째 1279억 원이 집행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원자력발전소를 자율 유치한 대가로 지원받은 1279억 원이 마을 주민들 간의 주도권 다툼에 10년 넘게 방치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업이 진행되면 지급되는 방식이라 물가상승률을 반영하면 276억 원에 달하는 금액을 허공에 날린 셈이다. 기피시설 유치 후 지원금을 두고 곳곳에서 갈등이 커지면서, 관련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9일 울산 울주군과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등에 따르면 울주군 서생면 주민 약 8500명은 2014년 새울 3·4호기 등 원전 2기를 자율 유치했다. 침체한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원전에 삶의 터전을 내주고 받은 지원금은 총 5730억 원. 이 중에서 법정 지원금을 제외하고 자율 유치 대가로 받는 법정 외 지원금은 약 1500억 원에 달한다. 원전 2기는 올해 10월부터 내년 말까지 차례로 완공될 예정이다.

지역 경제를 살릴 마중물이 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1500억 원을 둘러싸고 소송전까지 벌어지면서 이곳 주민들은 10년째 내홍의 늪에 빠져 있다. 2010년 9월 결성된 서생면주민협의회(주민협의회)는 이곳 일대 3개 마을 주민으로 구성돼 한수원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집행하는 권한이 부여된 단체다. 하지만 마을 3곳 사이에서 지원금 사용에 대한 주도권 싸움이 끊이지 않아 현재까지 221억 원만 집행됐다. 나머지 1279억 원은 여전히 한수원 측이 보유 중이다. 지난달엔 주민협의회 회장 선거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이 법원에서 인용돼 회장 공백 사태까지 벌어졌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부산 기장군은 주민들에게 전달된 원전 지원금 일부가 부정 사용된 정황이 드러나 경찰이 수사 중이다. 도수관 울산대 행정학과 교수는 “기피시설인 원전 설립 부지로 선정된 마을 주민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법률로 보장할 필요는 있지만 지원금을 어떻게 분배하고 사용할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마을 살리자” 발전소 유치하곤, 지원금 배분 갈등에 갈라져

원전 30기 지원금 3.5조원 달해
똘똘 뭉쳐 유치하고는 다툼 반복
주민간 소송전에 횡령 사건까지
“지원금 집행 공익재단 필요” 지적
“유치할 때는 한마음으로 주민들이 똘똘 뭉치지만, 결국 지원금 분배 과정에서 갈등이 터져 나오는 거죠.”

울산 울주군에 사는 한 주민은 지원금 1500억 원을 놓고 10년 이상 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29일 이렇게 말했다. 울주군 서생면 주민들이 원자력발전소를 자율 유치하면서 받은 지원금 외에도 전국 곳곳에 지급된 원전 관련 지원금은 3조5304억 원에 달한다. 1989년 제정된 발전소 주변 지역에 관한 법률에 따라 발전기로부터 5km 이내에 있는 지역이 속하는 읍면동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등 발전사업자로부터 법정 지원금과 법정 외 지원금을 받는다.

● ‘낙후 마을’ 발전소 유치 경쟁

발전소 1기당 수천억 원씩 지급되는 지원금을 받기 위해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은 사활을 걸고 발전소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부산 기장군 6기, 전남 영광군 6기, 울산 울주군 4기, 경북 울진군 8기, 경북 경주시 6기 등 전국에 있는 원전 30기 운영을 위해 지급된 지원금뿐만 아니라 수력발전소 7기, 양수발전소 7기에 대한 지원금도 2569억 원이 주민들에게 지급됐다.

최근 경기 포천시, 충북 영동군, 강원 홍천군, 경북 영양군, 경남 합천군 등 5곳이 양수발전소 대상 지역으로 선정돼, 이 중에서 합천군은 825억 원 넘는 지원금을 확보할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발전소 유치 과정에서는 지자체와 주민들이 합심해 유치전에 나서다가도, 정작 유치가 확정되면 갈등이 불거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경기 여주시 천연가스발전소와 경기 김포시 열병합발전소, 강원 양양군 양수발전소 등은 이권을 둘러싸고 주민 간 갈등이 터져 나오고 있다. 심지어 주민 간 소송전까지 벌어진 울주군 서생면에선 정부가 추진하는 신규 원전을 또다시 자율 유치하겠다면서 주민 4042명 명의로 유치 서명서를 울주군에 최근 전달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경북 영덕군은 2011년 이명박 정부 당시 신규 원전 건설지역으로 선정돼 특별지원금 409억 원을 받았다가 정부가 이를 회수하겠다고 통보하면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 ‘쌈짓돈’처럼 쓰다 쇠고랑

발전소 지원금을 둘러싼 폐단은 각종 비위로 드러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추진된 사업비 40조 원 규모의 ‘울산 부유식 해상풍력발전단지 조성사업’과 관련해 울산 지역 어민협회 300여 명은 해상풍력사업 대책위원회(대책위)를 5년 전 꾸려 사업 백지화를 요구했다. 그러자 민간 투자사 5곳에서 어민 피해 상생 기금으로 70억 원을 대책위에 건넸고, 대책위에서 이 기금을 둘러싸고 갈등이 불거지면서 경찰 수사로까지 이어졌다. 대책위는 상생 기금이 투명하게 배분됐는지 울산 해경에 수사를 의뢰했다. 대책위 회장과 사무국장 등은 업무상 배임 및 횡령 혐의로 해경수사를 받고 지난해 4월 재판에 넘겨졌다.

부산 기장군에서도 원전 지원금을 둘러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부산경찰청 형사기동대는 기장군 고리원자력본부에서 지급한 지원금을 사용한 사례 중 한 마을의 집행부가 대가를 받고 특정 업체에 지원금 관련 사업을 맡긴 혐의로 지난해 압수수색에 나섰다. 울주군 원전 주변 어민들이 허위로 해녀로 등록한 뒤 한수원으로부터 수십억 원의 보상금을 타낸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무려 130명이 넘는 어민이 해경에 입건됐고, 주범 등 5명은 실형 등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전문가들은 발전소 주변 지역에 지원금을 지급하는 현행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도수관 울산대 행정학과 교수는 “지원금을 집행하는 공익 재단을 설립해 중장기 프로젝트에 지원금을 쓰게 하고 주민 소득을 높일 수 있는 사업을 중심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제도를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원전 유치 지원금#1279억#주민 갈등#10년째 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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