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6일 경기 시흥시 목감동 행정복지센터에 40대 가장이 찾아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100만 원 상당의 온누리상품권을 건넸다.
이 상품권은 그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위기에 빠진 시민을 구해 119로부터 받은 상금이었다. 목감동에 사는 ‘의인’ 김종호 씨(43) 이야기다.
제조업체 대표인 김 씨는 지난해 6월 12일 오후 4시경 시흥에서 김포 방면으로 향하는 수도권제1외곽순환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김 씨는 편도 4개 차로 중 2차로에서 운전하고 있었다. 차가 막히는 시간대가 아니었지만 유독 2차로에서 전방 차량의 속도가 갑자기 줄기 시작했다. 감속을 일으킨 원인은 차량 몇 대 건너 앞쪽에서 달리던 ‘전기차 SUV’였다.
다른 차량은 속도가 줄어든 SUV를 차를 앞질러 갔지만, 김 씨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감은 맞았다. SUV는 급기야 1차선으로 방향을 틀더니 중앙분리대를 긁으며 운행을 이어갔다. 김 씨는 해당 차량 오른쪽으로 지나며 창문을 열어 내부를 살폈다.
30대로 보이는 SUV 운전자(남)는 의식을 잃은 채 사지가 경직돼 발작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김 씨는 “일단 차부터 세워야겠다는 것 외에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했다. 한시가 급했다.
김 씨는 SUV를 앞질러 본인의 차 범퍼를 들이댔고, 안전하게 SUV를 멈추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김 씨의 차는 후미가 파손되는 손상을 입었다.
“내차는 걱정 말라”며 홀연히 현장 떠나
김 씨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달려갔다. 다행히 SUV 조수석 쪽 창문이 반쯤 열려있던 덕에 잠긴 문을 열 수 있었다. SUV 운전자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고속도로 1차로 한 복판인 데다가 커브 구간이라 자칫 대형 화물차라도 덮친다면 김 씨의 목숨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김 씨는 운전석 의자를 눕히고 심폐소생술(CPR)을 시도했다. 처음 마주하는 위급상황이었지만, 수상구조사인 친형의 평소 조언을 떠올렸다. CPR을 하고 경직된 몸을 주무르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사이 뒤따르던 다른 여성 운전자도 차에서 내려 119에 신고하며 도움의 손길을 보탰다. 김 씨는 응급처치하는 동안 119 대원과 통화를 켜두고 실시간으로 현장 상황을 주고받았다.
얼마 후 SUV 운전자의 의식이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운전자는 “누구시냐?”고 어리둥절해하며 다시 운전해 가려고 했다.
김 씨는 “선생님께서 운전 중에 정신을 잃어서 제가 강제로 세웠다. 119가 오고 있으니 운전하지 마시고 잠시 안정을 취하고 계시라”며 달랬다. 그러면서 119가 도착하기까지 약 30분간을 붙잡고 기다려줬다.
이윽고 도착한 119 대원은 사고를 수습하며 김 씨 차량이 파손된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지 물었다. 김 씨는 “내가 고의로 일으킨 사고이니 내가 알아서 고치겠다”며 홀연히 현장을 떠났다.
SUV 운전자는 이전에 뇌출혈 수술을 받았는데, 운전 중에 발작 증세가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아내 “일해서 번 돈 아니니 기부하자”
얼마 후 김 씨는 119로부터 “의인상 대상자로 추천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김 씨는 “별로 한 것도 없다”며 민망해했지만, “아이들에게 좋다”는 말에 수락했다.
김 씨는 딸 셋(5, 9, 13세)을 둔 ‘딸부자 아빠’다. 아이들은 처음엔 아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다가 동영상을 보고 “아빠가 대단하다”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소방청은 차량이 빨리 오가는 위험한 고속도로에서 추가 교통사고를 방지하고 생명을 구해낸 공로로 김 씨에게 ‘119 의인상’을 수여했다.
김 씨가 소방청 상금(온누리상품권 100만 원)을 수령한 시기는 지난 2월이다. 마침 그 무렵은 김 씨 부인의 생일이었다.
김 씨는 아내 생일날 아이들과 둘러앉아 “오늘은 엄마 생일이니 우리 받은 상품권으로 맛있는 고기 먹고 예쁜 옷 사 입을 수 있다. 그런데 아빠는 엄마 생일 기념으로 다 같이 기부하고 싶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라고 물었다. 아이들은 선뜻 동의했다.
김 씨는 “사실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일감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아내는 ‘우리가 일해서 번 돈이 아니니 우리보다 더 힘든 한부모 가정 등에게 주는 게 맞다’며 뜻을 같이했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예전에 비슷한 일로 대형 교통사고를 막은 ‘투스카니 의인’을 보고 굉장히 감명받았다. 그 선한 영향력이 나에게까지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이 진짜로 내게 닥칠 줄은 몰랐다”며 “미천한 일이지만 그래도 이 사건이 또 누군가에게 귀감이 돼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좀 더 안전한 대한민국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고 소감을 밝혔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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