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건엔 이유가 있고 그 배경엔 정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요. 복잡한 보건복지 정책을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
국민연금 개혁이 또 무산될 위기입니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 주호영 위원장이 7일 “사실상 21대 활동을 종료하게 되는 상황이 왔다”라며 여야 합의가 결렬됐다고 밝혔습니다. 이미 17년 넘게 멈춘 연금 개혁을 제22대 국회로 넘기겠다는 건데, 말 그대로 기약이 없는 상황입니다.
국민연금 개혁의 의무를 놓아버린 국회와 정부, ‘내는 돈’(보험료율) 올리는 걸 반대하고 ‘받는 돈’(소득대체율)을 올리자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30년 후 월급의 3분의 1을 노인 세대 부양에 빼앗길 아이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으신가요.
“네 월급, 우리가 나중에 다 연금으로 가져갈 거야”라고요.
과장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월급의 3분의 1’이라는 미래조차 얼마나 희망적인 예측 위에 위태로이 서 있는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읽기 불편하시면 조용히 ‘뒤로 가기’를 눌러주십시오. 그 대신 앞으로 “요즘 젊은이들은 아이를 왜 이렇게 안 낳는 거냐”고 한탄하시면 안 됩니다. 미래세대가 자기 삶을 살기 어려운 나라를 만들기로 결정해놓고 아이를 낳으라니요. 그러시면 안 되죠. 내가 하기 싫은 건 남도 하기 싫은 겁니다.
그렇다고 국민연금 개편 논의를 다음 국회로 미루자는 건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개악’이라고 비판받는 ‘더 내고 더 받는’ 방안이라도 당장 실행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모순되게 들리실 겁니다.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 국회 논의 2개안 모두 언 발에 오줌 누기
이 단락은 평소 국민연금 제도에 관심이 있어서 최근 관련 논의도 잘 아는 분이라면 넘기셔도 됩니다.
국민연금은 젊을 때 돈을 내고 나이 들어서 돌려받는 제도입니다. 현재 돈을 버는 어른들(회사원, 자영업자)은 월급의 9%를 연금보험료로 내고 있습니다. 이게 보험료율입니다. 노인이 되면 월급의 40%를 연금으로 돌려받습니다. 이건 소득대체율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월급이 100만 원이면 연금보험료로 9만 원을 내고, 노인이 되어서 40만 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소득 수준과 가입 기간에 따라 실제로 받는 돈을 달라집니다. 제도에 소득재분배 기능이 내재돼있기 때문에 저소득층이 더 받고 고소득층이 덜 받죠.
분명한 건 ‘적게 내고 많이 받는’ 구조라는 겁니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해도, 낸 돈보다 평균 2.2배를 더 받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2055년이면 모아둔 돈이 모두 고갈됩니다. 그때부턴 ‘그해 걷어서 그해에 주는’ 부과방식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2055년 이후에는 모든 회사원이 월급의 약 30~35%를 연금보험료로 내서 노인 세대를 부양해야 합니다. 월급이 100만 원이면 30만~35만 원을 보험료로 떼인다는 뜻입니다. 일각의 과장된 추계가 아니라, 국내 최고의 전문가가 모여 인구와 경제 등 모든 변수를 고려해서 내놓은 가장 합리적인 예측입니다.
그래서 국회 연금특위는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고 국민연금 제도의 존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개편안을 논의해왔습니다. 연금특위가 시민대표단 500명에게 제시한 방안은 ‘소득보장안’과 ‘재정안정안’ 2가지입니다.
소득보장안은 ‘더 내고 더 받는’ 안입니다. 현재 9%, 40%인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각각 13%와 50%로 올립니다. 재정안정안은 ‘더 내고 지금처럼 받는’ 안입니다. 보험료율을 12%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40%로 현행 유지합니다. 둘 다 기금 고갈 시점을 늦추는 효과는 언 발에 오줌 누는 수준입니다. 2055년으로 예정된 걸 6, 7년 늦추는 정도라서요.
문제는 고갈 이후입니다. 소득보장안을 따라가면 그 후에 내야 하는 부과방식 보험료율이 개편 전보다 오히려 올라갑니다. 올해 성인이 된 2005년생의 평생 평균 월급의 14.8%를 보험료로 내게 됩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 2015년생은 22.2%, 내년에 태어날 2025년생은 29.6%입니다.
재정안정안을 택해도 기금 고갈을 막을 순 없지만 미래 세대의 보험료 부담은 상대적으로 줄어듭니다. 2005년생 13.1%, 2015년생 18.8%, 2025년생 24.5%입니다.
● 국민연금 ‘더 받자’가 56%… 역사에 어떤 세대로 기록될 건가
이 중에서 시민대표단이 고른 방안은 소득보장안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누구든 국민연금의 실상을 알게 된다면 미래세대에 그렇게 큰 짐을 맡길 수는 없다는 데 동의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연령별 투표 결과를 보면 특히 40대와 50대에서 소득보장안에 찬성한 비율이 높았다고 합니다. 평균 기대수명까지는 기금이 고갈될 우려가 상대적으로 적은 분들이네요.
더불어민주당은 ‘민의(民意)가 확인됐으니 이대로 추진하자’고 합니다. 이건 놀랍지 않았습니다.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때부터 소득대체율 인상을 주장해왔으니까요.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개혁안 4개 중 하나는 ‘현행 유지안’이었습니다.
더 황당한 건 정부입니다. 내내 ‘18지선다’ ‘24지선다’ 식으로 시나리오만 늘어놓으며 사실상 아무 의견도 내지 않더니 인제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라며 반대 전선에 섰습니다.
결국 연금특위 소속 여야 의원이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7일 ‘협상 결렬’을 선언했습니다. 연금 개혁을 1년 미룰 때마다 미래세대의 부담이 수조 원 증가할 것으로 추계(한국개발연구원)되는데 마냥 느긋합니다.
최근 연금 개혁을 두고 국회와 정부가 하는 일을 보면 합심해서 30년 후 미래세대에 겨울 햇볕처럼 짧은 즐거움이라도 안기려고 작정한 것 같습니다. 미래세대는 비록 생활은 비참할지언정 그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책임자들이 청문회와 특별검사에 줄줄이 불려 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보면서 잠시 속을 풀 수 있을 거 아닙니까.
● “수익률 높이면 된다”… 기금 줄면 수익도 급감해
국민연금에서 기금운용 수익은 중요합니다. 지난해 보험료 수입이 59조 원이었는데, 기금운용 수익은 126조 원이었습니다. 걷은 돈보다, 이미 걷은 돈을 굴려서 벌어들인 돈이 2배 이상으로 많았습니다.
이런 겁니다. 만화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악당을 무찌르기 위해 전 세계인의 기를 모아 원기옥을 만들죠. 여기에 힘을 보태고 나면 기력이 소진돼서 한동안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피로하다는 설정입니다. 이게 기금 고갈 이후 ‘그해 걷어서 그해에 주는’ 부과방식으로 바꾼 국민연금의 모습입니다. 저출생 고령화로 인해 몇 안 되는 젊은 세대가 온 힘을 다해 무(無)에서 기를 모아 원기옥을 만든 후 노인에게 전달합니다. 다음 달엔 모든 게 리셋(reset)돼서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이걸 매달 반복하면 제대로 살 수 없겠죠.
원기옥을 일정 규모 이상으로 유지하면서 복리(複利)로 굴리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악당이 나타날 때마다 전 세계인이 기진맥진할 필요가 없습니다. 국민연금 기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일하게 하라’는 투자 격언이 있죠. 기금을 어느 정도 쌓아놓고 거기서 나오는 이자를 활용하면, 보험료로만 노인을 부양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해집니다.
여기서 핵심은 종잣돈을 남기는 겁니다. 기금운용 수익률을 암만 높여도 기금이 고갈된 후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국민연금재정추계전문위원회가 지난해 9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현행 구조(보험료율 9%)에서 운용 수익률을 1%포인트 높이면 기금 고갈 시점은 2055년에서 2060년으로 5년 늘어납니다.
그런데 보험료율을 15%로 올리는 개혁을 병행하면 그것만으로도 기금 고갈을 2071년으로 늦출 수 있고, 여기에 운용 수익률을 1%포인트 높일 경우 기금 고갈 시점을 2084년으로 연장할 수 있습니다. 2000년에 태어나 올해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84세가 될 때까지 기금이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똑같은 1%포인트인데, 종잣돈이 있냐 없냐에 따라 이렇게 큰 차이가 납니다.
이건 단순히 산술적인 계산일 뿐입니다. 실제 기금 고갈이 시작되면 경제에 미치는 충격은 더 클 겁니다. 국민연금이 보유하고 있던 국내 기업의 지분을 헐값에 팔아야 할 테니까요. 게다가 기금이 줄어들기 시작한 후로는 공격적인 투자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평균 수익률도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50년간 ‘존버’(계속 버티기)할 수 있는 투자자와 당장 5년 안에 모든 자산을 현금화해야 하는 투자자의 수익률이 같을 수 없습니다. 위탁운용사는 과연 성장을 멈춘 자본에 전과 같은 ‘운용 수수료 프리미엄’을 줄까요. 그래서 기금 고갈을 늦추는 게 중요합니다.
● “세금으로 메우면 된다”… 그 세금은 누가 내나
‘더 내고 더 받자’는 주장에 항상 따라오는 근거는 한국의 노인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최악인데,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금 지출 비중은 2.8%로 OECD 평균(7.7%)보다 낮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지금 국가가 돈을 너무 안 쓰고 있으니 연금 적자를 세금으로 메꿔도 큰 탈 없다는 겁니다.
일견 합당해 보이는 주장이지만, 그 세금을 낼 당사자가 미래세대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미래세대가 노인 부양을 위해서 내야 하는 돈은 국민연금만이 아닙니다. 급격한 고령화로 인해 미래세대는 건강보험료로만 월급의 24%가량을 내야 합니다(국민건강보험공단, ‘2020~2060년 건강보험 장기 재정전망’).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월 30만 원씩 주는 기초연금은 어떻습니까. 전액 세금으로 대고 있는데, 지난해 관련 지출이 22조 원이 넘었습니다. 미래엔 기초연금을 받을 노인이 2배로 늘어나지만 이를 지탱할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절반으로 줄어드는 걸 고려하면, 지금 ‘기초연금세’를 따로 만들어서 미래를 위해 적립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GDP 대비 공적연금 지출 비중이 적어서 문제라면, 왜 생산가능인구가 가장 많은 지금 당장 세금을 투입하지 않고 청장년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30여 년 후에야 세금을 투입합니까? 세금으로 공적연금 강화하자는 분들은 내일부터 소득세율 부가세율 올려도 불만 없으신 거 맞죠?
노인 빈곤 문제를 국민연금으로 해결하자는 것도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현재 가장 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은 국민연금 보험료를 꼬박꼬박 낼 수 없었던 계층입니다. 기초연금을 소득 수준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개혁이 더 즉각적, 효과적으로 노인 빈곤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미래엔 주거비와 사교육비 부담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높은 보험료율을 감당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하지만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지방 기업이 망하면 수도권 집중(集中)이 더 심해져서 ‘살 만한 집’에 살기 위한 비용은 오히려 커질 수도 있습니다. 사교육비 지출은 지난 20년간 학령인구가 급감해도 점점 더 커지기만 했는데, 미래에 갑자기 사교육 경쟁이 해소될 거라고 기대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요. 오히려 ‘헬반도’ 탈출이 생존의 필수조건이 돼서 영어 과외비가 지금보다 비싸질 수도 있습니다.
인공지능(AI) 혁명으로 고령화에 따른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주장은 절망적이기까지 합니다. 미래세대의 운명을 판돈으로 걸고 도박하자는 얘기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마저 놓칠 순 없다
연금 개혁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습니다. 특히 당장 버는 돈에서 떼어가는 보험료를 올리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만약 제21대 국회가 폐원하는 5월 29일 이전까지 국민연금 개편을 매듭짓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2026년 6월엔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릅니다. 2027년 3월엔 대통령선거, 2028년 4월엔 제23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습니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정부와 국회는 투표권이 없는 미래세대보다 현재의 유권자를 달랠 정책에 집중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래서 저는 ‘개악’이라고 불리는 ‘더 내고 더 받는’ 안이라도 일단 밀어붙이길 제안합니다. 그 대신 4년 후인 2028년 제6차 국민연금 재정계산 때, 소득대체율을 40%로 원상복구하는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는 돈을 올리는 건 ‘나중에’ 받을 돈을 내리는 것보다 훨씬 저항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현행 보험료율 9%는 1988년 국민연금법 제정 때 정한 뒤 36년간 한 번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반면 소득대체율은 꾸준히 낮춰왔습니다. 보험료율은 단 1%포인트라도 올릴 수 있을 때 서둘러 올려야 합니다. 베이비부머 2세대(1965~1974년생)가 노동시장을 조금이라도 더 남아있을 때 보험료를 올려야 그나마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골든타임’이라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남용한 걸 사과드립니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정말로, 지금부터 20일이 골든타임입니다. 연금특위가 협상이 결렬됐다고 했지만,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믿습니다. 가장 심한 개악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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