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잇는 5·18]〈下〉 강신석 목사 아들 강의준 씨
1976년 유신반대 성명서로 옥고
신군부 후에도 민주화 운동 헌신… 가족들, 위협-협박 속에서 살아
아버지 이어 3대째 목회자의 길… 5·18 정신으로 사회문제 풀어야
“수배된 강신석 목사가 자수하지 않으면 큰아들을 삼청교육대에 보낼 수도 있습니다.”
목사 강의준 씨(60)는 1980년 5월경 신군부의 지시를 받은 수사관이 그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며 협박했다고 회고했다. 삼청교육대는 신군부가 1980년 만든 군대식 정치범 수용소다. 삼청교육대엔 조직폭력배 이외에 학생, 시민들도 있었다. 인원을 맞추기 위해 억울하게 끌려간 사람들도 상당수 있는 등 신군부의 대표 조직적 폭력, 인권 유린 사례로 꼽힌다.
의준 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대동고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의 이름은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 각종 기록에 적혀 있었고 학교에서는 요주의 학생으로 분류돼 신군부의 감시 대상이었다고 한다. 강신석 목사(1938∼2021)의 아들로 현재 광주 한 개척교회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의준 씨가 신군부의 감시를 받은 이유는 뭘까.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였던 아버지 강신석 목사는 5·18민주화운동을 알리고 인권운동에 앞장선 광주지역 시민사회 운동의 원로다. 광주 출신인 강 목사는 광주고, 한신대를 졸업한 뒤 전남 해남에서 목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전남 무안 해제중앙교회, 목포 연동교회, 광주 무진교회 등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강 목사는 1976년 광주 남구 양림교회에서 유신 반대 성명서 낭독을 주도해 옥살이하고 풀려났다. 그는 이후 신군부가 쿠데타의 목적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하며 민주 인사들을 마구 잡아들인 5월 17일 예비검속은 다행히 피했다. 5·18 항쟁 초기에는 시민군과 며칠 동안 광주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5·18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상경한 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주한 독일대사 등을 만나 광주의 참상을 알렸다.
서울에 피신해 있던 강 목사는 “큰아들인 의준 씨를 삼청교육대에 보낼 수도 있다”는 신군부의 협박을 전해 듣고 5·18 직후인 1980년 6월 결국 자수했다. 신군부에 의해 2, 3개월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뒤 군부독재 반대 운동을 펼쳤다. 1984년에는 독일까지 방문해 5·18의 진실을 알렸다.
강 목사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 5·18특별법 제정 투쟁 등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삶을 살았다. 문민정부 때에는 5·18 특별법 제정을 위한 100만 서명운동을 전개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고 5월 진실을 세우는 데 공헌했다. 이후에는 5·18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으며 YMCA 이사장, 조선대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민주, 인권, 평화·통일·교육 운동에 전념했다. 강 목사는 소외된 약자를 보듬고 민주·평화·인권 운동에 앞장서 민주화운동의 푯대를 세운 목회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강 목사는 1980년부터 광주 무진교회에서 ‘고난당한 자와 함께 드리는 예배’를 진행하며 5월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82년 무진교회에서 5·18 추모예배를 처음 진행한 뒤 항상 신군부의 감시 대상이 됐다.
의준 씨는 “아버지가 목회자로 있었던 무진교회는 1980년대 광주 시내 전세 건물 서너 곳으로 옮겨 다니다 서구 쌍촌동에 안착했다”며 “1980년대 무진교회 앞에는 항상 수사관들이 배치돼 있었다”고 말했다.
의준 씨는 1983년 전남대 의대에 입학한 후 광주 광산구 한 야학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1987년 의대 본과 1학년 때 자퇴를 선택한 뒤 한신대에 입학했다. 한신대를 졸업한 이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9년 동안 목회 활동을 했다. 귀국한 뒤에는 광주 남구 노대동 평화교회에서 목회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할아버지 강주원 목사, 아버지 강신석 목사에 이어 3대째 목회자 길을 걷고 있다.
의준 씨는 “아버지는 가족 개인보다 5·18 등 대의를 좇는 삶을 사셨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인사들은 가족들이 동의하지 않았지만 가족 모두가 옥바라지를 하고 위협에 시달리는 등 희생을 치렀다고 설명했다.
의준 씨는 “역사는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에 못지않게 5·18정신이 현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보탬이 되는 살아 있는 인권의 나침반이 돼야 한다고 했다.
3대째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의준 씨는 현실에서 살아 숨 쉬는 5·18정신과 광주 정신을 강조하며 말을 마쳤다. “역사는 박제화, 우상화돼서는 안 된다. 광주가 외국 노동자와 학생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더욱 포용하는 등 현재 사회의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대표적 인권도시로 자리매김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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