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현지 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의 한 슈퍼마켓. 한국 편의점, 슈퍼마켓에는 계산대 뒤편에 담배가 진열돼 있지만 이곳에는 담배가 안 보였다. 점원에게 “담배를 사고 싶다” 문의하자 점원은 기자의 나이를 확인했다. 그리곤 계산대 뒤편에 있는 흰색 서랍장의 미닫이 문을 열고 “어떤 담배를 원하냐”고 물었다. 점원은 검은 포장지 위에 폐암, 구강암 등 흡연 경고 사진과 문구가 부착된 담뱃갑 중에서 하나를 꺼내 건넸다. 말보로 레드 한 갑 가격은 16유로 50센트(약 2만4000원)이었다.
성인에게 대마초를 합법적으로 판매하는 네덜란드지만 아동·청소년이 담배를 접하는 것을 막는 정책은 한국보다 강도 높게 시행되고 있다. 네덜란드는 2020년 7월부터 슈퍼마켓을 비롯한 소매점에서 담배 진열을 금지했다. 찬장이나 서랍, 미닫이 문이 있는 서랍이나 커튼 뒤에 두고 손님이 요청하는 경우에만 꺼내 주도록 했다. 액상담배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은 ‘담배 없는 세대’를 만들기 위해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강력한 금연 정책을 펴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아동과 청소년이 담배를 접할 수 있는 환경 자체를 차단해 흡연율을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담배 광고와 진열 규제가 아동·청소년을 담배로부터 보호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한국 편의점, 슈퍼는 계산대 뒤편에 담배가 잘 보이게 전시돼 있다. 지난해 5월 정부는 규제심판회의를 열어 편의점에 부착해 놓은 반투명 시트지를 제거하고, 금연 광고가 인쇄된 현수막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31일 ‘세계 금연의 날’을 맞아 한국도 아동·청소년이 담배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편의점, 슈퍼마켓 등에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담배 진열대부터 규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계산대에서 눈을 들면 바로 보이는 곳에 형형색색 담배가 있는데 호기심이 안 들 수가 없죠.”
27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인근 편의점에서 물건을 구매하던 임모 군(15)는 계산을 하다 자신도 모르게 눈이 계산대 뒤편 담배 진열대로 향했다. 이 편의점의 담배 진열대에 놓인 담배갑은 형광 노란색, 빨간색부터 암갈색까지 다양한 색으로 포장돼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었다.
●온·오프라인 뒤덮은 ‘MZ 감성’ 담배 광고
동아일보가 이날 대치동 학원가 인근 편의점 11곳을 확인한 결과 외부에서도 계산대 뒤편에 있는 담배 진열대와 광고가 보이는 곳이 9곳에 달했다. 반면 정부가 부착을 의무화한 금연 광고는 눈에 잘 띄이지 않았다. 11곳 중 2곳은 아예 금연 광고 현수막을 걸어두지 않았다.
한국 학생들이 쉽게 담배 판매를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부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국가금연지원센터가 지난해 전국 12개 도시에 있는 교육환경보호구역 내 담배소매점 2143곳을 조사한 결과 1995곳(93.1%)에서 담배를 진열해 놨다. 담배를 진열한 편의점 대부분은 계산대 옆에 진열대를 배치했다. 교육환경보호구역은 학교 경계로부터 직선거리 200m까지를 포함한다.
최근 무인담배판매점이 확산하면서 아동·청소년이 더욱 쉽게 담배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해 정부가 무인담배판매점 시범 모니터링을 실시한 결과 전국 62곳 무인담배판매점 중 83.9%에 달하는 52곳이 매장 출입문에 성인 인증장치를 부착하지 않았고, 39곳(62.9%)에서는 청소년 출입 금지 문구를 부착하지 않았다.
23일 서울 도봉구에 있는 한 무인전자담배매장은 매장 출입구가 통창으로 돼 있어 밖에서 내부가 전부 보였다. 매장에는 250여 종 이상의 전자담배 액상 제품이 벽면에 비치돼 있었다. 이 매장은 교육환경보호구역인 학교 앞 200m 안에 위치해 있어 지나가던 학생들은 원색의 전자담배 매장을 흘낏댔다. 이날 하교하던 창경초 5학년 A 양은 “가게가 예쁘게 생겨서 내부를 계속 쳐다보게 됐다”고 털어놨다.
온라인 상에서도 학생들은 담배에 무분별하게 노출돼 있다. 한 전자담배 업체는 SNS 광고에 ‘MZ 필수템’, ‘폼 미쳤다’ 등의 유행어를 사용하며 청소년 등 젊은 세대를 겨냥한 광고를 내놨다. 이들 업계는 딸기, 바나나 등 맛과 향을 첨가하고 화려하게 포장함으로써 담배 제품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고 담배 사용에 대한 거부감을 낮추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해외는 담배 포장 디자인까지 규제
한국이 담배 진열조차 제한하지 못하는 동안 해외 주요국들은 담배 포장까지 규제하며 아동·청소년이 담배를 접하는 것을 막고 있다. 유현재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상품은 진열하는 것만으로도 광고의 역할을 하게 돼 있다”며 “담배를 진열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광고의 역할을 하는 만큼 광고에 준하게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2012년 호주를 시작으로 영국, 뉴질랜드, 네덜란드 등 24개국은 담배 포장을 단순하게 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글자 크기와 글꼴을 지정해 시선을 끌만한 요소를 넣을 수 없도록 하고, 브랜드 색상, 이미지, 회사 로고와 상표 없이 지정된 색상의 포장지로만 담뱃갑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2021년부터 담뱃갑 포장을 단순화한 네덜란드는 담배갑 색상을 모두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흡연 경고 사진은 담뱃갑 앞뒤 면적의 각각 65% 이상을 차지하도록 돼 있다. 대신 담배 제품명은 전면 하단에만 표기돼 있으며 브랜드 로고는 부착돼 있지 않았다.
반면 한국의 담배 포장 규제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한국은 담뱃갑 전면과 후면에 흡연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문구와 사진을 각각 50% 삽입하도록 했을 뿐 포장 단순화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한국의 담배 광고 및 판촉 규제에 대해 “잡지 및 소매점 담배 광고가 일부 허용되고 있고, 소비자에 대한 담배 제품 무료 제공 등 판촉이 허용되고 있다”면서 “담배 회사의 사회공헌 활동도 금지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미래 세대’ 아동 청소년 목소리 반영해야
전문가들은 정책의 당사자인 아동·청소년의 목소리를 금연 정책 수립 시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전자담배가 확산되면서 아동·청소년이 담배를 접하는 연령이 점점 더 낮아지고 있는 추세를 반영해 ‘아동·청소년의 문법에 맞는’ 금연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한국의 담배 진열과 포장 규제가 더 강력해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 강남구에 사는 강모 군(16)은 “외국에서 하는 것처럼 혐오스러운 금연 표지가 담뱃갑의 절반 이상이 된다면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흡연을 하고 있다고 말한 김모 군(18) 역시 “편의점에 금연 광고가 있는 것도 전혀 몰랐다”며 “담배 광고 자체를 혐오스럽게 만들면 경각심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이성규 한국담배규제연구교육센터장은 “매일 편의점을 이용하는 청소년을 담배 사용으로부터 막기 위해서는 소매점 내 담배 진열과 광고를 금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면서 “미래 세대이자 담배 업계의 주요 마케팅 대상인 아동·청소년의 목소리를 담배 규제 정책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헤이그=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 박경민 기자 me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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