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의료공백을 메우기 위해 해외 의사면허 소지자의 국내 진료를 허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가운데 의사 중에서도 “마취통증의학과 등 직접 환자와 소통하며 진료하지 않는 분야부터 해외 의사를 들여올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홍승봉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대한뇌전증센터학회장)는 30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생명이 위독한 중증 환자 수술이 마취통증의학과 의사 부족으로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되고 있다”며 “외국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라도 하루빨리 지원받아 시급한 수술을 진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형병원 현직 의사가 해외 의사 국내 진료에 찬성하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힌 건 처음이다.
홍 교수는 먼저 “의료공백이 100일 넘게 이어지면서 뇌전증 환자들의 수술 지연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뇌전증은 뇌 신경세포 이상으로 의식을 잃거나 발작이 생기는 등 뇌 기능이 일시 마비되는 질환이다. 국내 뇌전증 환자는 약 36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 약 12만 명은 약물 치료로 해결이 안 돼 수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홍 교수는 “수술이 시급한 중증 난치성 뇌전증 환자만 약 3만7000명에 달한다”며 “이들은 돌연사할 확률이 일반인의 30배에 달하는데 전공의(인턴, 레지던트)가 병원을 떠난 2월 이후 겨우 잡은 수술 일정마저 마취통증의학과 의사 부족으로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홍 교수는 직접 환자를 진료하지 않는 마취통증의학과의 경우 언어 장벽이 없어 해외 의사를 도입해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전망했다. 그는 “한국 의사와 간호사 대부분 간단한 영어 소통이 가능한 만큼 영어 소통이 가능한 외국인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는 업무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현행법은 해외 의사면허 소지자의 국내 진료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외국과의 교육이나 기술 협력에 따른 교환교수, 교육 연구 사업, 국제봉사단의 의료봉사 등의 경우만 보건복지부 허가를 받아 예외적으로 수술과 진료를 할 수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서 진행하는 ‘중동 의료인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한 중동 전임의(펠로) 130여 명이 국내 대형병원에서 전공의 공백을 일부 메우는 것도 교육 연구의 일환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정부는 이르면 다음 달 초 시행규칙을 고쳐 지금처럼 보건의료 위기경보가 ‘심각’ 단계인 경우 해외 의사면허 소지자의 국내 진료를 허용할 방침이다.
하지만 대한의사협회(의협) 등 의사단체는 “국민 건강권을 위협하는 일”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의사들 사이에선 소통이 안 돼 수술 중 의료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대해 홍 교수는 “정부가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고 이에 따라 전공의들이 복귀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만 이번 사태에 책임이 없는 중증 환자의 피해와 희생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막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뇌전증 수술을 하는 동료 중에도 해외 마취통증의학과 의사 도입에 찬성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누군가 해야 할 얘기라 욕먹을 각오로 제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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