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인생 2막〉
이주희 전 한국지방자치학회장… 20대엔 베스트셀러 작가
60대까지는 공무원 교수… 퇴직 후 여행, 유튜브 제작
70대에 다시 작가의 길… 73세 아들이 95세 부모 케어
1980년대를 풍미한 소설 ‘F학점의 천재들’을 아시는지? 50대 이상인 분들은 제목이라도 들어봤다는 반응이 대부분. 하지만 이 책의 필자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1951년생 이주희 씨가 살아온 이력에는 결이 다른 두 캐릭터가 공존한다. 20대엔 소설 ‘F학점의 천재들’을 써 선풍을 일으킨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30대부터 65세까지는 지방자치를 전공한 학자로서 진지한 학문 세계에서 살았다. 이 기간 독서와 글쓰기는 취미생활에 가까웠다.
70대를 넘긴 지금, 그는 돌고돌아 작가의 길로 회귀하는 듯하다. 올 초 언더그라운드 작가생활을 청산하고 문예지를 통해 제도권 문단에 들어섰다. 최근에 ‘아수라난장판(도서출판 천우)’이라는 사회 풍자 콩트소설집도 펴냈다. 70대가 된 ‘F학점 천재’의 근황을 들어봤다.
‘웃픈’ 시니어 기자 체험담
그를 만난 계기는 얼마 전 그가 메일로 보내온 재미있는 콩트 때문이었다. 00구 문화원이 모집하는 ‘시니어기자’에 응모해 석 달 간 겪은 일들을 적었는데, 관에서 ‘시니어’를 내세워 벌이는 사업의 ‘우습지만 슬픈’ 현실이 재치 넘치게 표현돼 있었다.
주인공은 67세. 코로나 사태로 답답하던 차에 ‘시니어 기자’ 모집 공고를 보게 된다. 구비서류는 1)지원서 2)이력서 3)경력증명서 4)자기소개서 5)문화예술 관련 기획 콘텐츠 1편(기사 또는 영상) 6)에세이 1편(A4 2장 내외).
꼬박 3일을 뛰어다니며 서류를 모아 제출, 1차 심사에 합격했다. 면접관 5명이 동원된 면접 심사도 통과해 무려 7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3명에 뽑혔다. 기자 위촉식에서 위촉장과 기자증, 명함을 전달받았다. 다만 사무실에 출근하는 것도 아니요, 보수는 월급 대신 원고료를 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행여나 취재지시가 왔을까, 매일같이 메일함을 열어보는 생활 3개월. 드디어 ‘00천 벚꽃 축제를 취재하라’는 지시가 왔다. 축제기간 6일 중 4일을 현장에서 취재해 원고지 5장 남짓 기사를 써서 사무국에 보냈다.
구정 홍보지에 기사가 실린 뒤, 계좌번호를 불러달라는 구청 직원의 연락에 그의 마음은 폭발했다. 원고료는 건당 2만 원, 1000자 이상이면 1만 원 얹어 3만원이라고 했다. 분명 돈 때문에 지원한 건 아니지만, 석 달에 3만 원 원고료라니….
받지 않는 게 스스로를 대접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메일로 사직서를 보냈다. ‘이 사직서가 이 땅에서 열심히 사는 노인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순교자의 저항으로 기록되기를 바랄 뿐’이라며.
한국 노인, 봉사자는 있어도 근로자는 없더라
―개인적으로 허울좋은 직함 뒤에 숨겨진 전시행정과 관료주의, 당하는 입장에서만 느껴지는 착취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표현하신 글을 보고 속이 다 시원하더군요.
“그 글로 2021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논픽션부문)을 탔어요. 제 체험담이고요. 무척 설레면서 시작했다가 딱 석달만에 그만뒀습니다. 서울시 25개구가 시니어 기자를 3명씩 뽑았다면 75명인데, 노인 일자리 75개를 창출했다고 통계를 낼 거라 생각하니 더이상 들러리 서고 싶지 않더군요.”
―콩트 중에 ‘공화국 노인들은 봉사자는 있어도 근로자로 존재할 수 없다’는 표현이 뼈를 때린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시니어’를 내세웠으면 노인을 위한 정책이 돼야 되는데 자기들 실적주의에 치우쳐 있어요. ‘몇 명 취직시켰다’는 것만 강조되죠. 노인을 이용하고 홀대하는 거예요. 뽑는 과정만 보면 엄청난 자리인 것 같잖아요. 면접심사에서는 ‘자치구의 문화예술을 발전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근엄하게 물어보더군요. 그런 건 문화원장 후보에게 물어봐야죠.” ―사실 시니어들이 겪는 부조리한 경험들은 개개인의 황당하고 억울한 체험으로 끝나고 사회에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합니다.
“불평하는 것 자체가 구차하게 생각되는 경우가 많지요. 예컨대 제가 68세때 일인데, 서울시가 운영하는 기관에서 유튜브 제작을 배우려 지원했더니 응시용 3분 동영상을 내라고 하더군요.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그 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죠. 저도 3분짜리동영상을 만들어 갖고 갔는데 결국 ‘65세 미만만 뽑는다’며 탈락시켰습니다. 웃기는 게 제 당락을 결정하기 위해 하루종일 면접을 봤어요. 그러고는 나이를 이유로 떨어뜨렸죠. 연령제한이 있다면 처음부터 오지 말라고 해야죠.”
―요즘 이른바 ‘신중년’을 고령자(65세)가 되기 직전까지 연령으로 설정해서 그런 것 같아요.
“70대는 이제 부르는 데가 없어요. 노인복지관에 가서 밥 먹는 것만 가능하죠. 저는 가끔 자전거 타고 집 근처 노인종합복지관 가서 저보다 나이많은 노인들과 점심 먹고 그곳 프로그램들을 기웃거립니다. 제가 지금도 ‘향부숙’이라는 사설 교육기관에서 공무원들에게 노인복지정책을 강의하고 있거든요. 강의 소재로 많은 참고가 됩니다.”
20대에 용돈벌이로 썼던 소설이 엄청난 히트
현실세계에서 그는 공무원을 가르치는 교수이면서 본인도 공무원이었다. 하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는 1980년대 초반을 풍미한 소설가였다. 1980년 3월 출간한 ‘F학점의 천재들’ 1편 ‘멋없는 배우들’은 근 1년간 베스트셀러로 기록됐다. 2년 뒤 2편 ‘자기전성시대’를 펴냈다.
당시 ‘F학점의 천재들’ 열풍이 불어 배우 원미경이 주연을 맡은 동명 영화가 개봉됐고 드라마센터에서 동명 연극이 46일간 공연됐다. 관객이 무대와 통로까지 들어찰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고. 몇년 뒤에는 라디오 드라마와 만화도 만들어졌다. 그는 “만화는 원작권을 불법으로 도용했더라”고 씁쓸해했다.
―어떤 책입니까?
“1970년대에 유행한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이 미국 법대생들 얘긴데, 제 건 한국 법대생들 얘기예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한 캠퍼스소설이죠. 시작은 주간지 연재였는데 당시 제목은 ‘F학점의 행진곡’이었어요. 제가 고시공부를 하다가 포기하고 군 입대까지 3개월 정도 시간이 남았었어요. 용돈이 너무 궁해 글이라도 팔아보려 쓴 건데, 주간경향에서 받아줬어요. 두어달 연재하다가 입대했는데 군대에서도 계속 썼어요.”
―군대 가서도 연재를 했다구요?
“보통은 어려운 일인데, 당시는 신문사가 힘이 센 시절이었어요. 훈련소장에게 협조를 요청해 그게 통했던 것 같아요. 논산훈련소에서 매주 원고를 써서 봉투에 넣어 연무대 터미널에 갖다주면 고속버스에 실어서 동대문 터미널에서 경향신문 기자가 받아가서 실은 거죠. 10개월쯤 연재했습니다. 제대 후에 그걸 다시 써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거죠.”
―그게 ‘F학점의 천재들’로 이름을 바꾸고 베스트셀러가 된 거군요.
“제 기억에 1편이 48쇄, 2편은 5쇄 찍을 정도로 많이 팔렸어요. 저작권도 명확하지 않던 시대니 정말로 몇부 팔렸는지는 사실 잘 모르죠. 20만부라는 설도 있고 40만부라는 설도 있어요. 1편은 근 1년간 신문 베스트셀러 코너에 올라가 있었어요. 1편 낼 때는 제가 무명인이라 원고료만 받았고 출판사만 돈을 많이 벌었지요. 2편은 책값의 10%를 인세로 받았습니다.”
2017년 66세가 된 그는 1,2편의 연장선에서 3편 ‘굿모닝 소울메이트’를 내면서 연작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어머니의 못다한 꿈, 아들의 부채감
소설이 인기를 끈 것과는 별개로 그는 직장에서 일했다. 1980년부터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 사무국장으로 5년, 지방행정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5년을 일한 뒤 1990년부터 지방행정연수원(현 행정안전부 지장자치인재개발원)에서 전임교수로 20년을 근무했다. 제 9대 한국지방자치학회장과 한국 매니페스토 공동대표도 역임했다.
―소설과는 확연하게 분위기가 다른 인생을 사셨는데요.
“밥벌이를 해야 했지요. 처자와 부모님을 부양해야 했거든요. 글 써서는 밥벌이가 안될 거라고 생각했고 큰 미련도 없었어요. 그 흔한 신춘문예에 도전한 적도 없어요.”
전남 구례의 농가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부를 잘해 부모님의 기대를 받았다. 중학교 2학년때 서울법대생 삼촌이 사는 친척집으로 혼자 유학 보내졌을 정도. 1년 뒤에는 온 가족이 상경했다. 부모님은 낯선 서울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4남매를 키웠다.
“부모님은 무조건 자식이 출세해서 권력자가 되길 바라셨죠. 그런데 저는 서울대 법대를 못 가고 한양대 법대를 장학금 받고 갔어요. 대학에서 데모와 학생회활동, 고시공부를 병행하다보니 고시에 실패했지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입학해서도 고시공부를 계속했지만 합격하지 못했어요. 크게 기대했던 부모님께 굉장히 미안했지요.”
어머니의 못다한 꿈은 95세가 된 지금도 여전해서, 간혹 그를 ‘서울대 법대 나온 아들’로 착각하신다고 한다.
평생 ‘부캐’였던 글쓰기, 인생 3막에서 다시 만나
이런 그는 퇴직 뒤 미뤄뒀던 장기 배낭여행을 다니고 다시 글을 쓰고 있다. 퇴직 직후 2년간 중국어를 배운 뒤 30일 이상 장기여행으로만 세 차례 중국 각지를 탐험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도 33일에 걸쳐 완주했다. 산티아고 여행기를 ‘월간 자치발전’에 연재중이고 블로그와 유튜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노년에 좀 자유로운 입장이 되어 창작 활동을 재개한 거군요.
“유튜브나 블로그나 제가 가진 지식과 정보를 다른 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겁니다. 저로서는 일종의 사회봉사인 셈이죠.”
유튜브 채널 ’F학점 천재 TV‘는 5월 30일 현재 구독자 1940명, 동영상 152개가 올려져 있다.
―유튜브 채널명이 ‘F학점 천재들’이네요.
“제가 미미한 존재이다보니 평생 어딜 가도 ‘F학점의 천재들’이 절 따라다녔어요. 다들 책은 안 읽었어도 제목은 들어봤으니까. 요즘 그런 거 있잖아요. ‘부캐(副캐)’라고, ‘또 하나의 자신’이죠. 이쪽 세상도 살고 저쪽 세상도 살고. 작가 일이 제게는 그런 것인 듯해요.”
―오랜만에 책(아수라난장판)도 내셨네요.
“우리나라 정치사회를 풍자한 33개의 콩트집이예요. 요즘 사람들이 긴 글을 안 읽잖아요. 도서출판계가 다 죽게 생겼어요. 콩트 한 편은 한 10분이면 되니 좀 읽어보지 않을까요?”
‘노노(老老)케어’의 엄혹한 현실
바야흐로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시대. 73세인 그는 95세 동갑인 부모님을 돌보며 100세 시대를 절감한다.
“부모님 모두 치매를 앓고 계세요. 특히 어머니는 30년 전 대장암 수술 후유증에 더해 지난해 고관절 골절이 왔어요. 두분 간병을 위해 재택 간병인이나 요양원 종합병원 등등을 전전했죠. 지금은 아버지는 댁에서 혼자 지내시고 어머니는 근교 요양원에 계세요.”
어머니에겐 4형제가 각자 월 1회씩 돌아가며 방문한다. 아버지는 서울에 사는 3형제가 이틀에 한 번씩 교대로 가서 식사준비를 해놓고 오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다고.
“저도 73세 노인인데, 노인이 노인을 모시려니 꽤나 힘들어요. 하지만 제 어머니도 73세때 시어머니(할머니)가 98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50년간 모셨지요. 정말 100세 시대예요.”
―앞으로 계획은….
“작가 직함은 별 의미 없어요. 앞으로 책은 산티아고 여행기 한 권, 노인이 삶에 관련된 소설 한권 쓰고 그만둘 거예요. 다만 제 정신이 말짱할 때까지는 지방자치법 조문별 판례해석을 계속할 겁니다. 유튜브건 글쓰기건 제가 가진 것을 사회와 공유하며 치열하게 살고 싶습니다. 백수(白手)로 백수(白壽)하고 싶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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