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가 일상 공간 파고든 마약
캠핑 장비에 양귀비 등 대량 경작
작년 밀경사범 3125명, 마약범의 18%
“마약 자체 재배는 확산의 최종 단계”
올 4월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 경찰이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아파트에 들이닥치자 꿉꿉한 대마 향이 코를 찔렀다. 30대 남녀가 베란다에 화분을 빼곡하게 두고 ‘도심 내 밀경(密耕)’을 하고 있었던 것. 이들은 직접 기른 대마를 동결 건조기 등 전문 장비로 가공까지 해서 유통업자에게 넘긴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대마와 양귀비 등 마약류를 몰래 재배하다가 경찰에 검거된 국내 밀경 사범이 관련 집계가 시작된 1990년 이후 처음으로 3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7일 확인됐다. 밀경은 투약, 밀수나 밀매가 급증한 후 나타나는 범죄로, 마약 확산의 최종 단계로 분류된다. 마약과의 전쟁에서 판판이 밀리던 우리 사회가 내어줘선 안 될 ‘레드라인(한계선)’마저 뺏길 위기라는 우려가 나온다.
경찰청에 따르면 마약류 밀경 사범은 2021년 1037명에서 2022년 1656명, 지난해 3125명 등으로 2년 새 3배로 늘었다. 특히 전체 마약류 사범 중 밀경이 차지하는 비율이 같은 기간 9.8%에서 13.4%, 17.5%로 급등했다. 지난해 전체 마약류 사범이 1만7817명으로 사상 최다였는데, 그중에서도 밀경이 급증했다는 뜻이다.
특히 주택가 등 일상 공간에서도 소형화된 첨단 장비를 이용해 대규모 경작을 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중랑구에선 빌라와 아파트에 캠핑 장비를 활용하고 공조 설비까지 설치해 대마를 밀경한 권모 씨(27) 등이 검거됐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 따르면 실내에서 재배된 대마는 최근 10년 새 세계적으로 실외 재배분을 추월했다.
전문가들은 마약 밀수와 유통에만 단속이 매몰돼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밀경 확산은 한국이 마약 ‘중개국’에서 ‘소비국’으로 악화했다는 뜻”이라며 “밀경이 ‘가성비도 좋고 위험성도 적은’ 마약 조달법으로 자리 잡지 않도록 수사력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들판에 널린 열매 쪼개니 ‘톡’ 쏘는 향… 헤로인 원료 ‘나도양귀비’였다
[위클리 리포트] 일상 공간 파고든 마약… 양귀비 개화기 집중단속 동행 자생력 강해 도로 틈에서도 자라… 바람에 날려온 씨, 모르고 키우기도 열매 가공하면 강력한 마약으로 변신… 집 옥상부터 공장형 경작까지 등장 “농촌 경각심 키우고 드론 순찰 강화해야”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연푸른색 4000㎡(약 1200평) 들판에는 나팔꽃처럼 보이는 보라색 꽃이 400송이 넘게 피어 있었다. 주변에 사람 하나 없이 한적한 이 풀밭 안으로 건장한 사람들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허리를 굽힌 채 신중한 표정으로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남성이 말했다. “양귀비의 일종인 ‘나도양귀비’네요. 이걸로 아편이나 헤로인처럼 강력한 마약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지난달 14일 낮 12시경 112 신고를 받고 제주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로 출동한 제주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수사관들이었다.
양귀비 개화기를 맞아 제주경찰청 등 전국 경찰이 집중단속에 나선 가운데 양귀비 등 마약류를 몰래 재배하다가 검거된 국내 밀경(密耕) 사범이 2년 새 3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마약 범죄를 막으려면 해외에서 마약을 들여오는 밀수범뿐 아니라 국내 밀경 감시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가공만 거치면 한순간에 마약… 경찰 양귀비 집중 단속 실시
제주경찰청에 ‘내 땅에 핀 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112 신고가 들어온 건 이날 오전이었다. 들판에 수상한 꽃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마약수사대 내에서 ‘드론맨’이라 불리는 하종석 경사가 본인 소유 드론을 띄우자 수풀 속 나도양귀비의 분포가 태블릿PC에 표시됐다.
같은 팀 김진수 경위가 풀밭에 꿇어앉은 채 나도양귀비 줄기에 매달린 도토리처럼 생긴 열매를 손으로 쪼갰다. 청양고추처럼 톡 쏘는 냄새와 함께 하얀 진액이 흘러내렸다. ‘앵속’이라 불리는 이 액체는 모르핀과 헤로인, 코데인 등 강력한 마약의 원료로 악용될 수 있다. 흔한 풀꽃처럼 보이는 나도양귀비가 가공 작업만 거치면 한순간에 마약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양귀비는 제주에서만 자란다. 압수 과정에서 흩날린 씨앗이 도로의 갈라진 틈에서 싹을 틔울 정도로 자생력이 강하다. 김 경위는 나도양귀비가 피어 있는 들판에 도착해 주위를 살핀 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씨가 날려 자생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누군가 의도한 밀경이 아니라 씨앗이 날아와 스스로 자랐다는 뜻이다. 실제로 본인도 모르게 자라난 나도양귀비 수백 주를 키우다 엉겁결에 단속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제주청은 4월에도 총 2038송이의 나도양귀비꽃을 발견해 압수했다. 대부분 스스로 자란 것이었다. 이날 마약수사대는 현장에서 발견한 나도양귀비를 제초제를 뿌려 모두 폐기 처리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3월부터 7월까지 전국 시도경찰청에 양귀비 집중단속을 지시했다. 특히 양귀비 개화기인 5월부터 7월까지 양귀비와 대마를 불법으로 재배하는 행위를 집중적으로 단속하고 있다. 경찰은 첩보 수집과 탐문 활동을 토대로 양귀비 밀경 우려 지역을 점검해 발견 즉시 폐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대규모 재배자, 동종 전과자 등에 대해선 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여죄까지 면밀히 수사할 방침이다.
● 밀경 2년 새 3배로… 일상공간 파고든 밀경
마약은 주로 해외를 거쳐 구하거나 화학 제조로 유통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국내에서 몰래 재배하는 밀경도 늘어나는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마약류 밀경 사범은 2021년 1037명에서 2022년 1656명, 지난해 3125명 등으로 급증했다. 전체 마약류 사범 중 밀경이 차지하는 비율도 같은 기간 9.8%에서 13.4%, 17.5% 등으로 높아지고 있다.
이 중 일부는 밀경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다. 본인 소유 토지에 나도양귀비가 자라는 것 같다며 경찰에 신고한 임모 씨(62)는 “색이 비슷해서 나팔꽃인 줄 알고 뒀다. 관련 기사를 읽지 않았으면 마약류에 해당하는 줄 전혀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농촌에서 양귀비를 약으로 쓴다며 기르는 등 밀경이 문화처럼 자리 잡은 것도 경각심 저하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어려서부터 할머니 댁에서 양귀비를 키워 온 것을 보며 자랐다는 회사원 박모 씨(28)는 “시골에 갈 때마다 지붕 위 옥상에서 키운 양귀비로 술을 담가 가족끼리 나눠 마시는 모습을 봤다”면서 “인삼주 같은 거라고 생각해 십수 년 동안 불법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소규모 재배도 불법이라는 걸 얼마 전 알았다. 현재는 재배를 안 하신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순 관상용으로 키워도 처벌을 면치 못할 수 있다. 지난달 29일 강원 속초시에서는 양귀비를 밀경하다가 적발된 4명을 대상으로 총 2717주를 압수하는 일이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압수된 양귀비 중 대부분은 주로 화단 등 개인 주택 인근에서 재배된 것으로 밝혀졌다. 속초해양경찰서는 “지난해까지는 50주 미만 재배에 대해서는 압수와 계도에 그쳤지만 올해부터는 예외 없이 처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다른 경찰 관계자 역시 “관상용으로 키워도 고의성이 인정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의 벌금 등에 처할 수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 ‘대마 공장’ 등 조직적 재배도… “마약 확산 최종 단계”
증가한 밀경 사범 중 상당수는 단순 관상용이나 취미를 넘어서 유통을 목적으로 마약류를 재배한 조직이다. 경기 남양주시에서는 창고형 건물을 빌려 대마를 키우던 일당이 2022년 검거됐다. 수사기관이 현장을 덮쳤을 때 건물 안에는 제습기, 발광다이오드(LED) 조명기기, 전자저울 등 대마의 생장을 촉진하고 가공하기 위한 전문 장비가 가득했다. 이 조직은 대마의 생장주기에 맞게 생육실과 개화실을 나누기까지 했다. 검찰은 이들이 국내에 적극 마약을 유통할 목적으로 마약류를 대량 재배했다고 보고 재판에 넘겼다. 주범은 같은 해 11월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조직적 밀경이 번성하는 이유는 완성된 마약을 밀수하는 것보다 그 원료를 직접 재배하는 게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마약류는 필로폰 등 향정을 밀수해 유통하는 단계에서 대마나 양귀비 등을 현지에서 직접 재배하는 순서로 확산하는 게 통상적이다. 이미 한국은 그 최종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종전에는 소량의 마약류를 해외로부터 들여와 유통하고 소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면서 “마약과 관련한 우리 사회의 경각심이 무뎌지면서 점점 국내에서 대량으로 재배하는 형태로 변화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밭이나 창고 등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지는 밀경은 물론이고 주거 공간에서 소규모로 하는 밀경도 철저히 단속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도심에선 다가구주택 등에서 재배한 뒤 양귀비 뿌리, 열매 등 전체를 술에 담가 제조해 판매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점을 고려해 드론 순찰 등을 더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 1월 광주지법은 광주 광산구의 자택에서 상습적으로 양귀비를 키운 A 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A 씨는 2차례 단속된 후에도 지난해 2월에서 5월까지 자택 텃밭에서 양귀비 288주를 재배하다가 다시 적발됐다.
윤흥희 남서울대 국제대학원 글로벌중독재활상담학과 교수는 “양귀비는 진액을 주사로 투약하거나 물에 타 먹는 등의 방법으로 주로 악용되고 있다”며 “밀경이 마약 사범 사이에서 ‘가성비’ 좋은 공급 방식으로 자리 잡은 만큼 이를 차단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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