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도권의 한 기업 팀장은 부하 직원에게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당했다. “뭐 하는 짓이야”라고 반말을 하며 괴롭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다. 오히려 부하 직원이 평소 업무 마감기한을 지키지 않는 등 근무 태만을 저질렀다는 동료들의 증언이 이어졌던 것. 팀장은 존대를 하며 이 같은 문제를 지적했지만 부하 직원이 무시하는 태도로 팀장에게 반말을 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해당 사건은 ‘직장 내 괴롭힘’이 없었던 것으로 마무리됐다.
#2. 올 3월 한 정보기술(IT) 업체 대리는 상사의 지시를 상습적으로 이행하지 않아 징계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해당 대리는 상사가 자신을 성희롱했다고 신고했다. 남성인 자신에게 “여성스럽다”는 발언 등을 했다는 것이다. 신고하기 전 노무법인 등에서 신고 요령 등 관련 상담까지 받았다고 한다. 결국 회사 측은 신고가 접수된 직후 징계 절차를 중단했다. 이 업체 관계자는 “평소 근무태도가 심각하게 불량한 직원이었는데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한 경우 불이익을 줄 수 없도록 규정돼 있어 결론이 나기 전까지 징계는 커녕 업무 관련 지적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2019년 7월 이른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시행된 지 5년이 지난 가운데 이처럼 제도를 오남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약자를 보호하려는 법 취지에 맞게 구제받은 이들도 많지만 괴롭힘에 대한 모호한 기준을 파고들어 무분별하게 신고부터 하고 보자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 징계 피하고, 실업급여 타내려 신고 악용
9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건수는 지난해 1만28건으로 사상 처음으로 1만 건을 넘어섰다. 신고 건수는 2020년 5823건, 2021년 7774건, 2022년엔 8961건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다만 지난해 접수된 신고 10건 중 8건(86.2%) 넘게 ‘법 위반 없었음’, ‘신고 요건 성립 안됨’, ‘신고 취하’ 등으로 종결됐다.
문제는 상사의 정당한 업무 지시에도 ‘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를 들어 신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주로 △실업급여 수급 △부서장 교체 △근로계약 갱신 △징계 회피 등을 목적으로 신고를 남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중소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두 달 전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 둔 퇴사자로부터 “상사가 괴롭혀 퇴사한 것이니 자발적 퇴사가 아닌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직 사유를 정정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하면 자발적 퇴사와 달리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조치가 이뤄지지 않자 결국 이 퇴사자는 직장 상사를 고용노동부에 신고했다.
● 모호한 규정 탓에 행정력 낭비 부작용도
무분별한 신고로 인해 이를 심의·감독하는 노동 당국의 행정력도 낭비되고 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직장 내 괴롭힘 신고는 양측 진술이 엇갈릴 때가 많아 조사부터 처리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며 “두 달 내에 조사를 완료하게 돼있는데 신고 건수가 1만 건을 넘어서 감독관들에게 과부하가 걸리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신고가 접수되면 지방 고용노동청 소속 근로감독관 1명이 조사를 벌여 괴롭힘 여부를 판단한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11월 준사법기관인 노동위원회 조정을 통해 직장내 괴롭힘을 처리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 진전은 없는 상태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구체적 개념과 기준을 명시하는 것도 오남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이승길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유럽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선 직장 내 괴롭힘을 판단할 때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통해 일회성 신고를 걸러내고 있다”며 “노동위원회와 같이 전문성이 높은 기관에 조사 권한을 넘겨 모호한 기준 문제를 해소하는 것도 신고 남용을 막을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임재혁 기자 heok@donga.com 이상환 기자 payb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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