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오남용 늘어
징계 피하고 실업급여 수급 등 목적… ‘직장 괴롭힘’ 신고 작년 1만건 돌파
86%가 ‘위반 없음, 요건 안됨’ 종결… “명확한 기준 만들어 남용 막아야”
#1. 수도권의 한 기업 팀장은 부하 직원에게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당했다. “뭐 하는 짓이야”라고 반말을 하며 괴롭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다. 오히려 부하 직원이 평소 업무 마감 기한을 지키지 않는 등 근무 태만을 저질렀다는 동료들의 증언이 이어졌던 것. 팀장은 존대를 하며 이 같은 문제를 지적했지만 부하 직원이 무시하는 태도로 팀장에게 반말을 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해당 사건은 ‘직장 내 괴롭힘’이 없었던 것으로 마무리됐다.
#2. 올 3월 한 정보기술(IT) 업체 대리는 상사의 지시를 상습적으로 이행하지 않아 징계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해당 대리는 상사가 자신을 성희롱했다고 신고했다. 남성인 자신에게 “여성스럽다”는 발언 등을 했다는 것이다. 신고하기 전 노무법인 등에서 신고 요령 등 관련 상담까지 받았다고 한다. 결국 회사 측은 신고가 접수된 직후 징계 절차를 중단했다. 이 업체 관계자는 “평소 근무 태도가 심각하게 불량한 직원이었는데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한 경우 불이익을 줄 수 없도록 규정돼 있어 결론이 나기 전까지 징계는커녕 업무 관련 지적도 못 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2019년 7월 이른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된 가운데 이처럼 제도를 오남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약자를 보호하려는 법 취지에 맞게 구제받은 이들도 많지만 괴롭힘에 대한 모호한 기준을 파고들어 무분별하게 신고부터 하고 보자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 징계 피하고, 계약 갱신하러 신고 악용
9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건수는 지난해 1만28건으로 사상 처음으로 1만 건을 넘어섰다. 신고 건수는 2020년 5823건, 2021년 7774건, 2022년엔 8961건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다만 지난해 접수된 신고 10건 중 8건 넘게(86.2%) ‘법 위반 없었음 결론’ ‘신고 요건 성립 안 돼’ ‘신고 취하’ 등으로 종결됐다.
문제는 상사의 정당한 업무 지시에도 ‘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를 들어 신고하는 ‘오피스 빌런’(직장 내 악당)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주로 △실업급여 수급 △부서장 교체 △근로계약 갱신 △징계 회피 등을 목적으로 신고를 남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중소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두 달 전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둔 퇴사자로부터 “상사가 괴롭혀 퇴사한 것이니 자발적 퇴사가 아닌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직 사유를 정정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하면 자발적 퇴사와 달리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조치가 이뤄지지 않자 결국 이 퇴사자는 직장 상사를 고용부에 신고했다.
● 모호한 규정 탓에 행정력 낭비 부작용도
무분별한 신고로 인해 이를 심의·감독하는 노동 당국의 행정력도 낭비되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직장 내 괴롭힘 신고는 양측 진술이 엇갈릴 때가 많아 조사부터 처리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며 “두 달 내에 조사를 완료하게 돼 있는데 신고 건수가 1만 건을 넘어서 감독관들에게 과부하가 걸리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신고가 접수되면 지방 고용노동청 소속 근로감독관 1명이 조사를 벌여 괴롭힘 여부를 판단한다.
고용부는 지난해 11월 준사법기관인 노동위원회 조정을 통해 직장 내 괴롭힘을 처리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 진전은 없는 상태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구체적 개념과 기준을 명시하는 것도 오남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이승길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유럽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선 직장 내 괴롭힘을 판단할 때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통해 일회성 신고를 걸러내고 있다”며 “노동위원회와 같이 전문성이 높은 기관에 조사 권한을 넘겨 모호한 기준 문제를 해소하는 것도 신고 남용을 막을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