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64)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63)의 이혼 소송에서 노 관장의 재산 분할금 몫이 1조3808억 원이라는 항소심 판결이 내려진 것을 두고 ‘노태우 비자금’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지난해 6월 노 관장은 1심에서 제출하지 않았던 약속어음 300억 원(1992년 선경건설 명의 발행) 등을 증거로 제출했고, 항소심 재판부가 이를 근거로 당시 최종현 SK 선대 회장에게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자금이 유입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SK는 “300억 원을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사실이 없고, 퇴임 후에 그 액수만큼을 주기로 약속한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300억 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자금 조성 경위나 불법성 여부 등을 밝히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자금 실체, 그 돈의 성격은 무엇일까.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 과정을 재확인하고, 법조계 인사들을 취재해 ‘노태우 비자금’의 2대 쟁점을 살펴봤다.》
● “비자금이라면 노 관장에게 주는 게 맞나”
1991년경 노 전 대통령이 300억 원의 자금을 갖고 있었다면 합법적인 자금이라기보다는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불법 비자금의 일부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는 것이 법조계 다수의 의견이다.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대선 공약으로 재임 중에 대통령의 재산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 취임 이후인 이듬해 4월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전 재산이 5억2000만 원이라며 구체적인 내역까지 공개했다. 재산 목록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과 주식, 예금, 부동산 등이 있었다. 스스로 공개한 재산이 5억 원 정도에 불과한데 집권 4년 차에 전 재산의 60배 가까운 돈을 합법적으로 취득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법조계의 분석이다.
노 전 대통령은 거액의 비자금 문제로 대국민 사과를 하고,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다. 1995년 10월 비자금 조성 의혹이 불거지자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재임 중에 매년 1000억 원씩 약 5000억 원 상당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1700억 원이 남아있다고 공개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은 “단 한 푼도 국가에 기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실제 비자금 규모는 8000억 원에 이를 것이란 의혹이 제기됐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수사와 기소를 거쳐 1997년 2628억 원의 추징이 확정됐고, 2013년 이를 완납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발간한 회고록에서도 “비자금 사건이 발생하자 보유 중이던 현금과 비자금을 빌려 간 기업에 대한 채권 내역을 제출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추징금을 납부하는 과정에서 그는 2009년 동생 재우 씨와 조카 호준 씨를 상대로 비자금으로 설립한 회사를 내놓으라며 소송을 벌이는 등 친인척과의 소송전도 불사했다. 김옥숙 여사는 2013년 “친인척에게 차명으로 맡겼던 비자금을 국가가 환수해주면 미납 추징금 231억 원을 모두 납부하겠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검찰에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SK의 약속어음 300억 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공개하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300억 원이 불법 자금인지에 대해선 판단하지 않았지만 “만약 노태우 측이 최종현으로부터 받은 약속어음과 보관 경위가 (이번 재판이 아닌 과거에) 대외적으로 공개됐다면 대한민국이 최종현을 상대로도 추심 소송을 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도 불법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노 관장 측은 항소심 판결 이후 300억 원이 비자금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자 불법 비자금은 전혀 아니라는 입장을 내놨다. 노 관장 측은 “불법 자금이라고 볼 증거가 전혀 없고, 실제로도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그게 불법성이 있다면 상식적으로 노 전 대통령이 그런 불법적인 자금을 사돈(최종현 선대 회장)에게 맡겼겠느냐”고 주장했다.
법조계에선 노 관장 측의 주장과 재판부의 판단대로 300억 원이 SK에 흘러갔다고 인정하더라도 ‘불법 비자금’일 수 있는 돈을 노 관장의 ‘기여’로 인정한 것은 논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항소심 판단대로라면 노 관장 측이 불법 비자금을 증여세 없이 받은 다음 대규모 재산 증식의 원천으로 쓴 것이 정당화되는 결과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에서 노태우 비자금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비자금에 대한 추가 단죄가 필요하다고 보는지에 따라 상고심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재판부가 인정한 300억 원의 원천은 결국 불법 자금일 것”이라며 “300억 원을 노 관장의 기여로 인정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법 해석’인지를 두고 상고심에서 쟁점이 될 수 있어 보인다”고 했다.
盧측 “SK 유입돼 성장에 기여”… SK측 “받지도 주지도 않았다”
● “유입됐나, 안 됐나”… 전달 과정 명확한 증거 없어
항소심 재판부는 이 같은 판결을 내리면서 노 관장 측이 제출한 어음과 메모 등을 근거로 삼았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온 선경건설(현 SK에코플랜트) 명의의 50억 원짜리 약속어음 실물 4장과 사진 2장, 김 여사가 지인들에게 맡겨둔 비자금 내역을 1998년, 1999년 적었다는 메모다. 맨 위에 ‘1998년 4월 1일 현재’라고 적힌 메모에는 ‘선경-300억’이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약속어음은 1995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비자금 수사와 재판에선 드러나지 않았다가 이번 이혼 소송 과정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노 관장 측은 “300억 원이 태평양증권 인수 자금 등으로 쓰여 SK 성장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SK 측은 재판 과정에서 300억 원을 노 전 대통령 측으로부터 받은 적이 없고, 퇴임 후 그에 상당하는 돈을 주기로 약속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2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 수사로 드러나지 않았던 비자금이 29년 후 천문학적 재산 분할 분쟁의 씨앗이 된 것이다.
판결문을 읽어 보면 재판부도 입금증이나 계좌 추적 내역 등 명확한 증거를 바탕으로 노 전 대통령 자금이 유입됐다는 판단을 했다기보다는 양측의 주장 중 우위에 있다고 본 쪽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SK 관계자는 “약속어음 발행 날짜는 1992년 12월 16일인데, 1991년경 이미 300억 원이 전달됐다고 판단하려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전달했는지 계좌 거래 내역 등을 통해 입증해야 하지만 전혀 입증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이런 증거를 바탕으로 한 사실관계는 인정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설령 300억 원이 전달됐다고 해도 이 자금이 1994년 대한텔레콤(현 SK㈜) 지분 인수 때까지 남아있었다는 입증도 전혀 없다”고 했다.
SK 주장대로 비자금을 받은 대가로 ‘300억 원 약속어음’을 발행한 게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쓸 자금을 약속한 것이 맞다면 재산 분할금은 큰 폭으로 줄어든다. 재판부 판단의 대전제가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약 2조 원 규모의 SK㈜ 주식 1297만5472주(지분 18.44%)가 분할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1심도 SK㈜ 주식을 분할 대상에서 제외하면서 재산분할금을 665억 원만 인정했다.
법조계에선 300억 원이 SK에 실제로 전달됐다고 하더라도, 환수는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이미 추징금이 완납된 상태로, 추가로 추징하려면 이에 대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며 “공소시효가 지나고 당사자인 노 전 대통령이 2021년 사망한 만큼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공교롭게도 추가 수사나 추징, 과세 등이 어려운 시점에 노 관장 측이 비자금 관련 자료를 30년 만에 이혼소송을 통해 처음 공개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1995년 검찰 수사 당시 노 전 대통령 비자금의 전모와 사용처가 100% 규명되지 않은 점이 ‘비자금 은닉’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당시 검찰 수사는 노 전 대통령과 이현우 전 대통령경호실장, 대기업 총수들의 진술에 주로 의존해 이뤄졌다.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금융실명제법 시행 이전 거래들이라 무기명 수표가 많아 추적이 어려웠다”며 “기업 총수들까지 완강히 부인하는 경우 반박할 자료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수사팀 관계자 역시 “국민적 관심사가 엄청나서 수사를 빨리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며 “일부 기업은 총수도 모른다고 해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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