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대 대법원장 인터뷰]
재판 지연 해소” 거듭 역설… 법관 3000명이 年 600만건 맡아
다른 나라보다 업무 2∼8배 많아… 법관 늘리고 법관임용제 손볼 필요
재판연구원-사법보좌관 충원해… 판사의 과중한 업무 분담시켜야“
“제가 제일 외롭습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14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장 집무실에서 가진 동아일보 단독 인터뷰에서 “어려운 시기에 와서 책임감이 무겁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해 12월 취임 직후 ‘재판 지연 해소’를 사법부의 최우선 현안으로 꼽은 그는 주로 점심을 혼자 집무실에서 먹으며 시간을 아껴 일하고 있다. 휴대전화에는 ‘챗GPT’를 깔아두고 세계 각국의 사법제도 등을 영문으로 직접 찾아본다. 최근 2개월간 전국 법원을 돌며 구성원을 만나온 조 대법원장은 취임 이후 첫 언론 인터뷰에서 4시간 동안 재판 지연 등 사법부 현안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혔다.
―최우선 과제로 꼽은 재판 지연 문제의 진단은 마쳤나.
“근본적으로 법관 부족이 심각하다. 휴직 등을 빼면 3000명도 안 되는 법관이 연간 600여만 건을 맡아 부담이 다른 나라보다 2∼8배 수준으로 많다. 거기에 가정법원의 면접교섭 같은 복지후견이나 회생사건 등 업무 범위도 늘어나는데 인원은 그대로다.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도 증거로 인정되지 않으니 모든 증인이 법정에 나와야 해 예전에 수백 건 처리할 시간에 한 건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복합적 문제인데 구체적 해결 방안은….
“결국 법관 수가 늘어야 하고 법관임용제도 우리 실정에 맞게 손질해야 한다. 우선 법원장이 실태를 상세히 알기 위해 직접 장기미제사건 재판을 맡도록 했다. 판결문을 핵심만 간단히 써서 한 주당 3건씩 쓰던 것을 5, 6건씩 써 보자고도 제안했다. 또 재판연구원과 사법보좌관 등을 적극 충원해 법관 업무를 분담시켜야 한다. 사법 정보화를 서둘러 기록들을 전자화하고, 사건 요약과 판례 검색 등에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내년부터 법관 최소 법조경력이 5년에서 7년으로 늘어나는데….
“배석판사는 3∼5년, 재판장은 10년으로 최소 법조경력을 이원화하는 방식으로 법원조직법을 개정해야 한다. 한국이 (3명이 재판하는) 합의부를 유지하는 이상 거기에 맞는 판사를 뽑아야 한다. 체력이 좋아 기록을 꼼꼼히 볼 수 있는 젊은 배석판사와 경륜을 토대로 유무죄를 가릴 수 있는 재판장이 상호 보완 관계를 이룰 수 있게 해야 한다.”
검사와 변호사 등 법조 경력자들만 판사로 뽑는 ‘법조일원화’는 다양한 사회 경험이 있는 법관을 선발하자는 취지로 2013년 도입됐다. 내년부터는 법조경력 7년 이상, 2029년부터는 10년 이상의 변호사나 검사만 판사가 될 수 있다.
―배석판사는 젊게, 재판장은 노련하게 뽑자는 건가.
“내가 아는 노래 중에 ‘몰라서 걸어온 그 길, 알고는 다시는 못 가게 된다’는 가사가 있다. 처음엔 몰라서 했지만 겪고 나면 못 한다는 내용이다. 재판연구관을 할 때 주말에 아픈 몸을 이끌고 다음 날 내야 하는 보고서를 한 페이지씩 넘길 때 이 가사가 생각나더라. 배석판사는 그만큼 깨알같이 악착같이 봐야 하는데, 법조경력 3∼5년 된 젊은 인재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경륜 있는 법관이 재판하면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미국식 법관임용제는 우리나라 현실과 안 맞는다. 영미법 근간의 배심제인 미국은 당사자끼리 공방을 벌이고 재판장은 진행자로 다툼이 있을 때만 개입한다. 미국 형사재판은 무죄면 항소도 없고 판결도 안 쓴다. 반면 우리는 법관이 기록을 직접 다 검토해 유무죄를 가리고 많게는 수천 쪽짜리 판결문도 써야 한다. 이런 나라에서 미국식으로 하는 건 국민을 속이고 엄청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이미 실패한 벨기에 사례가 있는데 ‘우리는 끝까지 가보고 돌아가자’고 할 이유가 있나. 환상을 심어줄 게 아니라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재판기간을 법으로 정하는 방법은 어떤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헌법에 명시돼 있다. 예를 들어 선거사범은 1심을 6개월, 2∼3심을 각각 3개월 안에 선고하도록 공직선거법에 강행 규정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사실상 지켜지지 못할 만큼 법관 부족이 심각하다.”
조 대법원장이 건넨 서류에는 선거사범의 재판기간을 강행 규정으로 정한 공직선거법 제270조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를 어겨도 재판 자체를 무효로 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해당 규정은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다. 법관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법정 규정마저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21대 국회에서 법관 증원 법안이 폐기됐는데….
“전국 법원을 순회할 때 ‘법관 한 명이라도 보내 달라’는 말을 가는 곳마다 들었을 만큼 전국 모든 법원에서 법관 부족이 정말 심각하다. 법관 수는 법으로 정해져 있어 법 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3214명인 법관 정원을 5년에 걸쳐 총 370명 늘리는 법관정원법 개정안은 올 5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제1소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여야의 무관심 속에 끝내 국회 문턱을 못 넘고 폐기됐다.
―젊은 엘리트 사이에선 더는 판사가 1순위 지망이 아닌데….
“법관 급여가 동년배 로펌 변호사의 70% 정도라도 돼야 한다. 사명감으로만 법관을 하라고 하면 제도 운영이 안 된다. 로펌 급여의 3분의 1만 받고 누가 법관을 하려 하겠나. 싱가포르에선 법관 보수를 로펌 파트너 수준으로 획기적으로 높였더니 국민의 사법 신뢰도가 90%가 넘는다고 한다.”
―사법부 예산이 국가예산의 0.33% 수준밖에 안 되는데….
“결국 재판 지연도 예산 부족과 맥이 닿아 있다. 재판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형사소송 전자화도 예산 문제로 늦어지고 있다. 최근 법원 전산망 해킹 사태 이후 전담 전문가를 채용하려 해도 월급이 너무 낮아 구인난이 심했다. 사법부 예산을 2000억 원만 증액해도 2조 원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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