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못굴의 비극”… 4·3 군법회의 피해자 30명, 재심서 무죄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6월 25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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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재심 재판부, 수형인 30명 전원 무죄
법정에서 비극의 현장 ‘빌레못굴’ 사연 언급

제주4·3 당시 토벌대를 피해 주민들이 숨어든 빌레못굴. 제주동굴연구소 제공
제주4·3 당시 토벌대를 피해 주민들이 숨어든 빌레못굴. 제주동굴연구소 제공
“눈망울 초롱초롱 할머니 품에 안겨 울부짖는/두 살배기 외사촌 동생은 억센 손아귀에서 발목 잡혀/돌담에 팽개쳐 핏덩이로 산산이 부서져 버렸네.”

25일 제주지법 201호 법정에서 제주 4·3사건 당시 비극의 현장이었던 ‘빌레못굴’을 주제로 다룬 시(詩) 한 구절이 담담한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4·3사건 관련 재심 재판에서 유족인 김충림 씨(83)가 재판부의 양해를 구해 자신이 쓴 시를 낭독한 것이다.

제주지법 제4형사부(부장판사 방선옥)는 이날 제50차 4·3 군법회의 피해자 30명에 대한 직권재심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2022년 3월 제1차 직권재심 이후 이날까지 총 1452명의 군법회의 피해자가 억울함을 풀었다.

이번 50차 직권재심 대상자 30명은 1948년과 1949년 두 차례 열린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 또는 내란 혐의로 기소돼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당시 군법회의 재판을 받은 인원은 2530명에 달한다. 군법회의는 공소장이나 공판 기록, 판결문 등이 남아 있지 않아 사법부에서도 불법성을 인정한 재판이다.

가족의 무죄를 확인한 김충림 씨(왼쪽)와 아들 김광현 씨가 손을 잡고 법원 밖으로 나가고 있다. 제주=송은범 기자 seb1119@donga.com
가족의 무죄를 확인한 김충림 씨(왼쪽)와 아들 김광현 씨가 손을 잡고 법원 밖으로 나가고 있다. 제주=송은범 기자 seb1119@donga.com
이날 법정에선 제주시 애월읍 어음2리 빌레못굴에서 벌어졌던 비극이 소환됐다. 1949년 1월 16일 빌레못굴에는 어음, 납읍, 장전리 주민 29명이 난리를 피해 숨어있었는데, 수색을 벌인 토벌대에 의해 발견돼 집단으로 총살됐다. 특히 토벌대는 굴 밖으로 나온 남자아이의 발을 잡고 휘둘러 돌에 메쳐 죽였으며, 이 아이의 어머니와 누나는 총소리와 비명 소리에 동굴 깊숙이 다시 들어갔다가 1970대 초반 백골 시신으로 발견됐다. 법정에서 시를 낭송한 김 씨의 어머니는 빌레못굴에서 가족 6명의 죽음을 수습한 장본인이다.

김충림 씨의 시 낭송이 끝난 뒤에는 김 씨의 아들 김광현 씨(55)가 마이크를 잡았다.

“두 살배기가 돌에 메쳐져 살점이 뜯어지고, 뼈가 흩어져 수습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4·3이 끝난 뒤 할머니는 애월읍에서 식당을 하셨는데, 두 살배기를 죽인 경찰이 돈조차 내지 않고 밥을 먹으러 자주 찾아왔다고 합니다. 억장이 무너집니다.”

또 다른 유족인 김광현 씨(71)는 작은아버지가 친동생 시신을 지게로 이틀 동안 옮긴 사연을 털어놨다.

“4·3 당시 작은아버지가 조천읍 선흘리에 있는 보리밭에서 일하는데, 동네 사람이 ‘너네 동생 함덕해수욕장에 누왕(워) 있져’라고 했답니다. 작은아버지가 함덕해수욕장엘 가보니 동생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이 자빠졍(누워) 있었답니다. 작은아버지는 (동생의 시신을) 가마니에 말앙(고) 지게로 이틀 동안 지엉(어) 고향인 선흘리에 묻어줬다고 합니다.”

이날 검찰(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은 “4·3사건 당시 이념과 공권력의 이름으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일 2만5000명에서 3만명이 희생됐다. 하지만 유족들은 수십 년 동안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하고 통한의 세월을 보냈다. 앞으로 이러한 비극이 없길 바란다”며 재판부에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방 부장판사는 “2019년 제주에 부임하면서 4·3사건을 알게 됐고, 가족과 처음 4·3 유적지로 찾았던 곳이 빌레못굴이었다”며 “빌레못굴을 찾을 당시 희생자의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지금도 빌레못굴을 지나면 아픔을 느낀다”며 이날 직권재심 대상자 3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4·3사건#빌레못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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