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도쿄에서 만난 우쓰노미야 겐지(宇都宮健兒·78) 변호사는 정식 업체의 가면을 쓴 불법 조직이 판치는 한국의 현실과 관련해 이렇게 단언했다. 그는 50년 넘게 불법사채 피해자를 지원해 온 대표적인 활동가다. 일본의 사채 문제를 다룬 소설 ‘화차’(1992년) 속 변호사의 모델이기도 하다.
특히 대부업체 설립 문턱이 낮고 처벌이 약한 탓에 업체 등록증이 200만~300만 원에 암거래되는 국내 현실에 대해 우쓰노미야 변호사는 “일본에선 대부업 등록 자체가 쉽지 않다”고 했다. 앞서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국내 온라인 대부중개 플랫폼에서 광고 중인 대부업체 62곳을 검증한 결과 합법적으로 영업한 업체는 3곳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우쓰노미야 변호사는 “한국에선 아무도 (불법사채를) 단속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의 사무실 책상엔 약 20년 전 야미킨(闇金), 즉 불법사채 피해자를 상담한 자료와 함께 신문 기사 스크랩이 앉은키 높이로 여러 더미 쌓여있었다. ‘야쿠자가 차주(채무자) 납치’, ‘일가족 자살’, ‘채무자 자살 명소로 전락한 후지산’…. 오늘날 한국보다 심각했던 일본의 불법사채 문제를 보여주는 제목들이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서는 이런 광경을 상상하기도 어려워졌다. 2006년 대금업법(한국의 대부업법)을 뜯어고치고 연달아 제도를 개선한 덕분이다. 기상천외한 대책을 내놓은 게 아니었다. 도쿄에서 만난 현지 전문가들은 “단순한 두 가지 원칙을 뚝심 있게 밀어붙인 결과였다”고 입을 모았다. 아무나 대부업을 못 하게 한다. 걸리면 엄하게 처벌한다. 그 결과 불법사채 조직은 발을 붙이기 힘들어졌다.
한국 정부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업 진입 단계부터 불량 업체를 걸러내고, 위법을 일벌백계하려는 시도는 다른 현안에 밀리거나 ‘시기상조’라는 우려 속에 번번이 무산됐다. 정부가 불법사채를 근절하겠다며 2년 전 출범한 범정부 태스크포스(TF)도 합동 단속이나 예방법 홍보 등 핵심을 비껴간 대책만 내놓고 있다. 불법사채가 비대면 플랫폼을 장악하도록 방치해 피해자의 고통이 커지는 한국과 이를 해결한 일본. 두 나라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 자살과 납치 횡행했던 2000년대 일본
‘밤마다 걸려 온 추심전화에 죽음을 결심.’
2003년 6월 15일, 일본의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야미킨을 쓰고 조직의 협박을 받던 일가족 3명이 전날 오사카에서 철로에 누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일가족이 빌린 금액은 3만 엔(약 26만 원). 빚 독촉을 견디다 못해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외면당했다.
이처럼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선 불법사채 조직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야반도주하거나 자살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후지산 자락 아오키가하라 숲에서 생을 내려놓는 채무자가 늘자 피해자 지원 단체가 숲길 입구에 “빚 문제는 반드시 해결할 수 있어요. 일단 저희랑 상의해요”라고 적힌 자살 방지 안내판을 설치했을 정도다.
● 대부업체 설립비용, 한국의 45배
당시 일본 불법사채 시장은 지금의 한국과 닮아 있었다. 자격 요건이 헐거워 영세 대부업체가 난립했다. 불법사채 조직도 활개 쳤다. 더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여론이 일었다.
시민사회가 먼저 움직였다.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참고한 건 한국이었다. 당시 한국은 불법사채 억제를 위해 대부업법을 제정한 지 4년째였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우쓰노미야 겐지 변호사는 2005년 ‘한국금리조사단’를 꾸리고 한국에 머무르며 물렀다. 결론은 ‘좌고우면하다가 제대로 된 규제를 도입하지 못한 한국처럼은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우쓰노미야 변호사는 “규제가 약한 한국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았다”고 했다. 일본에선 ‘역시 강력한 규제가 필수다’라는 여론에 힘이 실리면서 국회와 정부가 대부업 관련 법 개정에 착수했다. 2006년 개정된 법에서는 대부업 등록 요건을 대폭 높였다. 대부업체를 차리려면 순자산이 5000만 엔(약 4억3500만 원) 이상이어야 했다. 18년 전부터 오늘날 한국 기준(1000만 원)의 45배에 달하는 문턱을 세운 것.
업체를 차리려면 3년 이상 대출 업무 경력이 있어야 하고, 대부업 자격시험을 통과한 직원을 꼭 고용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 이 시험은 관련법과 재무, 회계 지식을 평가하는 국가 공인 필기시험이다. 올 3월 기준 누적 수강생 10만793명 중 2만8244명(28.0%)만 합격했다. 반면 한국은 대부업자의 자질을 평가하는 시험도, 인력 상주 규정도 없다.
물론 법 개정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정식 대부업체의 문턱을 높일수록 신용이 낮은 저소득층은 불법사채로 내몰릴 수 있다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 정부와 국회는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면 시행 전까지 4년이나 계도 기간을 두고 준비했다.
● “걸리면 원금까지 환수”
2006년부터 불법사채 처벌도 강화됐다. 법정 상한을 넘는 이자를 요구하는 불법 고금리 영업은 5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 엔(약 8700만 원) 이하 벌금에, 미등록 영업은 10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 엔(약 2억6100만 원) 이하 벌금에 각각 처할 수 있게 했다. 반면 한국은 대부업법 위반에 따른 가장 높은 벌금액이 5000만 원이다. 범죄수익의 최고 10배까지 벌금을 물리는 특정경제범죄법이 불법사채에는 적용되지 않아서다.
법이 바뀌면서 불법사채 수사에도 속도가 붙었다. 우쓰노미야 변호사는 “이전에는 경찰이 ‘야쿠자에게 팔이라도 잘려야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라며 “하지만 법 개정과 시민단체의 집단 고소가 이어지면서 전국 경찰서가 ‘야미킨 대책본부’를 꾸리고 집중 수사했다”고 회상했다. 우쓰노미야 변호사가 이끈 시민단체가 2002~2010년 고소한 불법사채 사건은 6만3458건에 이른다. 일본 경찰청은 그 무렵부터 지금까지 매년 백서를 통해 불법사채 조직 검거 현황을 따로 공개하고 있다. 사법부도 이런 사회적 변화에 화답했다. 2008년 6월 일본 대법원은 “불법사채는 위법한 계약이기 때문에 (사채 조직에) 원금도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놓았다. 최대 규모의 야미킨 조직 ‘야마구치파’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의 결론이었다. 법조계는 이를 ‘불법사채 근절에 본보기가 된 판결’이라고 평가한다. 불법사채를 하다 걸리면 본전도 못 찾는다는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불법사채로 처벌돼도 빌려준 원금과 법정 이자는 법으로 보장받는다.
● 대부업체 한국의 6분의 1로 줄어
일본의 정식 대부업체는 지난해 3월 기준 1548곳. 한국(8771개)의 6분의 1 수준이다. 인구 대비로는 한국의 14분의 1이다. 법 개정 여파로 영세 대부업체들이 문을 닫고 탄탄한 중견업체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업체 수가 줄면서 촘촘한 관리·감독이 가능해지면서 대부업 시장도 투명해졌다. 강력한 단속으로 불법사채 사건도 급감했다. 일본 법무성에 따르면 검찰에 접수된 불법사채 사건이 2003년 1679건에서 2022년 231건으로 줄었다. 물론 일본도 여전히 숙제가 남았다. 정식 대부업체의 대출 심사가 엄격해져 저소득층은 돈 빌리기 어려워졌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서민 금융 제도를 확대하고 민간 차원의 채무자 구제 활동을 활발하게 병행하면서 이런 ‘풍선효과’를 최대한 억누르고 있다. 도모토 히로시(堂下浩·60) 도쿄정보대 교수는 “정식 대부업체에 한해서는 법정 이율 상한을 높이는 등 ‘숨통’을 틔울 필요가 있다. 다만 불법사채는 수법이 교묘해짐에 따라 더 강력한 단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게 누가 사채 쓰랬냐”는 한국…日 ‘채무자 탓 그만’
불법사채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건 부실한 규제뿐만이 아니다. 사채를 쓰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시선도 장애물 중 하나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만난 31명의 불법사채 피해자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여겼다. “그러게 누가 사채 쓰랬냐”는 말과 따가운 시선 때문이었다.
한국보다 앞서 불법사채 문제를 겪은 일본은 일찍이 이런 인식의 개선에 힘썼다. 1970년대부터 사채 피해 구제에 힘써온 기무라 타츠야(木村 達也·80) 변호사는 서면 인터뷰에서 “당시엔 ‘차주책임론’(借主責任論·빌린 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이란 용어도 있었다”며 “이런 시선이 사채 피해가 고발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했다.
1970년대 일본에서는 고리대금업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과한 추심과 채무자의 자살이 늘었다. 샐러리맨이 주로 빌리는 사채, 이른바 ‘사라킨’(サラ金)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기무라 변호사는 1976년 오사카 변호사회 안에 사채 문제 연구회를 결성했다.
“세간에는 다중 채무에 빠지는 사람들은 낭비나 도박, 유흥 때문이라는 인식이 주를 이뤘지만, 변호사들은 대부업의 고금리·가혹한 추심·과잉 대출이 근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듬해에는 700여 명의 젊은 변호사와 학자 등이 모여 ‘전국사라킨문제대책협의회’가 만들어졌고, 이들은 피해자 설득에 나섰다. 인식개선이 우선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에 전국 47개 도도부현에 최소 1개씩, 총 85개의 피해자 단체가 생겼다. 매년 한 번, 전국의 변호사와 피해자 약 2000명이 모여 집회를 열었다. 이를 통해 생활고, 지병, 실업 같은 피해자들의 비참한 호소가 사회에 공유됐다.
기무라 변호사는 “‘빌린 사람 책임’이라던 시각이 ‘소비자 보호’로 바뀌게 된 때”라며 “집회를 통해 사채업자들의 악질적인 수법이 고발되면서 사회가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이 흐름을 타고 1983년 ‘대금업의 규제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대부업 등록이 의무화됐고, 대부계약사항과 추심에 관한 세부 조항이 생겼다. 다소 느슨했던 규제의 빈틈은 2006년 법 개정을 통해 해결해 나갔다.
일본과 달리 누구나 마음먹으면 불법 사채가 가능한 한국 상황은 ‘불법사채 못 막는 사회-(上) 한국편’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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