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잃은 신중년과 소멸위기 지역이 만났을 때 [서영아의 100세 카페]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6월 29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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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생 2막〉
패스파인더 김만희 대표
40~60대와 인구 감소 위기 지방을 관계인구로 이어주는 길잡이 자처
여행만으론 아쉽고 이주는 힘들 때 제2의 고향 위한 ‘팬슈머’ 활동 제안
40대 후반 ‘어떻게 살지’ 대기업 나와 … 중장년 사회공헌 도울 비즈니스 창안

대가야의 숨결이 느껴지는 지산동 고분군을 찾은 경북 고령의 팬슈머들. 패스파인더 제공
대가야의 숨결이 느껴지는 지산동 고분군을 찾은 경북 고령의 팬슈머들. 패스파인더 제공

“이번에 마을에서 카페를 여는데, 우리가 100만 원 정도씩 투자해서 마을도 돕고 카페 주주로 활동해보자는 얘기가….”

지난달 27일 서울 마포구에 자리한 서울시 50플러스 재단의 한 강의실. 50~60대 남녀 20여 명 앞에서 김만희(58) 패스파인더 대표의 설명이 이어졌다. 측면 벽에는 ‘남원 생활인구 활성화 교류 사업’이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1주일 뒤로 예정된 2박 3일 전북 남원 투어를 앞두고 프로그램과 일정 등을 공유하는 자리다.

김만희 대표는 48세에 안정적인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소셜벤처기업 ‘패스파인더’를 설립하고 신중년과 소멸위기 지역을 잇는 길잡이 역할을 자처했다 .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 여행⇒살아보기⇒지역 응원하는‘ 팬슈머’
“20명이 1차로 6월 초에 2박 3일, 남원을 알고 공감하기 위한 여행을 갑니다. 관광뿐 아니라 치즈 공장, 누룽지 공장 등 현지 기업을 둘러보며 탐색하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그리고는 7월 초에 이 멤버 그대로 다시 가서 2박3일간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일하게 됩니다. 참여자들은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남원을 돕게 됩니다.”

김만희 대표가 운영하는 소셜 벤처 ‘패스파인더’는 지역여행과 살아보기를 통해 삶과 일의 전환 계기를 얻는다. 궁극적으로는 지역 팬슈머(Fans+Consumer)로서 지역을 즐기고 소비하고 응원하며 외지의 주민 역할을 실천한다.

이렇게 2019년부터 전북 남원, 강원 강릉, 강원 인제, 경북 고령의 4개 지역에서 신중년과 지역을 생활(관계)인구로 이어주는 프로그램을 펼쳐왔다.

신중년의 후반전 길찾기를 지방과의 유대에서 찾는 김만희 패스파인더 대표가 서울 마포구 서울시 50플러스재단에서 이들이 방문할 남원시의 현황을 강의하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 각자 능력되는 만큼 지역 홍보
“한번에 많아도 20명, 참가자를 모집해서 지역과 서로를 알아가게 교육하고, 실제로 여행을 가본 뒤에 지역 홍보를 부탁드리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SNS로 지역을 알리고. 어떤 분들은 경영 컨설팅이나 코칭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가자 모집에 조금 까다롭고 조건이 많이 붙는다.

“서류 심사와 대면 인터뷰를 합니다. 혹시 단순 여행이나 살아보기 프로그램으로 알고 참석해 미스매치가 발생하면 서로 힘드니까요. 미리 ‘저희 이런 건데 알고 지원하셨어요, 이런 숙제가 있는데 하실 수 있으세요’를 여쭤봅니다.”

지역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때마다 참여자들이 직접 쓴 글을 묶은 ‘지역살이 가이드북’이 1권씩 나왔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패스파인더는 2022년 한국관광공사 최우수 관광벤처로 선정됐고 2023년에는 행정안전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패스파인더 소개책자에 실린 지역 팬슈머 개념.
패스파인더 소개책자에 실린 지역 팬슈머 개념.


지난해 고령시를 방문한 중장년들. 고령시는 특히 생활인구 확보에 열심이다. 패스파인더 제공


● 관계인구, 생활인구로 지역공동화에 대응
‘지방은 사람이 없어져 소멸을 우려할 지경인데, 서울에는 할 일이 없어 고민인 중장년들이 넘쳐난다. 서로 연결되면 참 좋을 텐데, 왜 안되는 걸까.’

패스파인더 사업은 이런 소박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2019년 소셜 벤처 형태로 설립한 뒤 고향 잃은 신중년과 소멸위기 지역을 관계인구로 이어준다는 미션을 내걸었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고 싶을 때, 관광만으로는 부족하고 귀농귀촌은 부담스럽다. 그 중간 어디쯤에 ‘살아보기’를 해본 뒤 지역을 응원하는 팬슈머로서 지역과 유대를 이어간다는 개념을 넣었다. 마침 일본에서 ‘관계인구’ 개념이 조명을 받으며 아이디어에 힘을 보태줬다.

관계인구는 그 지역 정주인구가 아니더라도 정기적으로 오가거나 지역과 관계를 맺고 지역활성화에 기여하는 인구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이를 참고해 지난해부터 ‘생활인구’ 개념을 도입했는데, 월 1회 3시간 이상 그 지역에 체류하는 사람을 생활인구로 파악한다.

관광객은 물론, 군인이나 회사원 학생 등도 생활인구로 집계될 수 있다.

예컨대 등록인구 2만 8000명인 충북 단양군의 생활인구는 관광으로 인한 체류인구 24만 1700여 명을 더하면 26만 9700명으로 불어난다. 등록인구 4만 2700명인 강원 철원군의 경우 군인 17만 6800명을 더하면 생활인구는 21만 9500명이 되는 식이다(2023. 6. 행안부).
“우리가 힘이 돼 드릴께요!” 서울서 내려간 남원 팬슈머 20여 명이 현지 기업 대표 10여 명과 ‘공감 워크샵’을 통해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패스파인더 제공
남원의 팬슈머들이 지역상품의 포장과 마케팅에 도움을 준 사례들. 왼쪽은 SNS를 통한 제품홍보, 가운데는 브랜딩 전문가가 제작한 카드뉴스, 오른쪽은 ‘따뜻한 사진가 협동조합’이 이 찍어준 제품 홍보용 사진들이다


● 전산학 전공한 IT전문가, 40대 후반에 인생 전환
국내 최고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십수년 년 간 대기업(SK텔레콤)에서 근무하던 IT전문가에게 나이 마흔을 넘어서며 ‘현타’가 찾아왔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이 회사는 언제까지 다니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어요. 이전까지는 최대한 오래 회사 다니는 게 인생 목표였을 텐데, 그게 흔들린 거죠. 스콧 니어링의 책, 회사를 통해 알게 된 사회적경제에 대한 관심, 경계성 종양 수술 등이 이어지면서 보람된 인생 후반을 생각하게 됐지요.”

이때 떠올린 것이 ‘중장년의 사회공헌을 도울 수 있는 비즈니스’다.

“생계형 일자리를 넘어 사회공헌, 앙코르 커리어(인생후반 지속적 수입과 개인적 성취, 사회적 가치를 만족하는 일자리) 쪽을 생각했어요. 이게 사회적인 수요가 많다고 봤죠. 퇴직까지 기다릴것 없이 지금 하자.”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48세를 맞은 2014년 직장에 사표를 냈다. 즉시 카이스트의 ‘사회적 기업가 MBA’과정에 입학하고 이듬해 ‘앙코르브라보노’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 연장선에서 2016년 출범한 서울시 50플러스 재단에서 ‘일자리사업본부장’으로 2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서울시 재단을 2년만에 그만둔 이유는?

“솔직히 일하기 너무 좋았어요. 동료들도 좋고. 그런데 이러다가 안주해버리겠구나 싶더군요. 사실 SK텔레콤 때도 비슷했죠. 주저앉을까봐 두려웠어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삶인데…”

경기도 광주에 마련한 김만희 씨 가족의 첫 집. 그는 이 집을 ‘인생 2막을 위한 아지트’라고 표현하고 있다. 김만희 씨 제공
경기도 광주에 마련한 김만희 씨 가족의 첫 집. 그는 이 집을 ‘인생 2막을 위한 아지트’라고 표현하고 있다. 김만희 씨 제공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카이스트의 ‘사회적 기업가’ MBA 과정에 입학했다. 사진은 졸업식 장면. 그가 최고령 학생이었다고. 김만희 씨 제공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카이스트의 ‘사회적 기업가’ MBA 과정에 입학했다. 사진은 졸업식 장면. 그가 최고령 학생이었다고. 김만희 씨 제공


● “귀농귀촌도 아니고 여행도 아니고”
2019년 패스파인더는 한국관광공사가 지원하는 예비관광벤처로 선정돼 마케팅와 파일럿 테스트 비용을 지원받았다. 정작 그가 ‘벤처’ 간판을 노린 이유는 지역과 만날 때의 인증효과 때문이었다.

“첫 1~2년 간은 설명하기 참 어려웠어요. 귀농 귀촌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행도 아니고….”

―그래서 ‘살아보기’군요.

“저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귀농 귀촌은 대단히 무거운 주제입니다. 말을 꺼내는 순간 마음의 문을 닫게 되죠. ‘난 안돼, 가족도 반대하고…’라며. 반면 지역에서 며칠이건 몇달이건 살아보다가 좋으면 귀농 귀촌할 수도 있는 거죠.”

패스파인더가 발간한 ‘살아보기’ 도서들

―팬슈머가 귀농귀촌의 중간다리 역할인가요?

“중간다리 역할도 있지만 팬슈머 자체만으로도 크게 의미가 있어요. 청년들이 군대 2~3년 다녀오듯, 중장년들이 농촌에 가서 얼마간 살다가 돌아가더라도 이 사이클이 계속 돌아가면 의미가 있죠. 그들의 인생 후반 활동 무대를 넓혀주고, 지역에도 활기를 줄 수 있어요.”

―실제 패스파인더를 통해 살아보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듯한데요.

“저희는 사전사후 교육 및 참여자 간 커뮤니티를 중요하게 여기고, 장기간 살아보기는 따로 지역 프로그램과 연계를 합니다. 또 어느 지역이건 제가 먼저 가서 두세 달 살아봅니다. 투어 참여자들이 갈 곳, 만날 사람들을 미리 만나고 준비를 하죠. 지역 분들도 저희가 왜 오는지, 와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아셔야 대처할 수 있어요.”

―귀농 귀촌했다가 텃세 때문에 고통받은 분들 얘기가 많이 들리던데요.

“생활인구·관계인구는 귀농 귀촌과는 ‘포지셔닝’부터 다릅니다. 귀농귀촌은 사실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내려가는 거잖아요. 집 팔고 재산 다 갖고 가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 자칫 현지인들과 경쟁 포지션이 돼요. 그런데 생활인구 관계인구는 대부분 보완재로 들어갑니다. 내가 여기 와서 이분들 걸 빼앗기보다 이분들 것을 홍보하거나 팔거나 직접 소비해주기 위해 가는 거죠. 귀농귀촌하는 분들은 지역에 ‘내게 뭘 지원해줄 수 있나?’를 묻지만 생활인구는 ‘혹시 우리가 도와줄 게 있을까?’를 묻는 거죠.”

남원 행정마을 서어나무숲. 2000년 ‘제1회 아름다운 숲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곳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200여 년 전 조성된 인공 숲이다. 김만희 대표가 가장 사랑하는 숲이기도 하다고. 패스파인더 제공


● 지역을 응원하고 소비해주는 외지인
2019년 패스파인더의 첫 방문지였던 남원에 다녀온 회원 중 6명은 현재도 ‘남원이음’이란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 중이다. 가장 최근 다녀온 경북 고령도 멤버들이 모여 지역을 도울 방안을 상의하고, 고령 전통시장에 점포를 얻어 지역과 교류를 계속할 계획이다.

막걸리와 맥주의 도원결의? 인제 팬슈머 상당수는 아예 냇강두레농업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돼 버렸다. 맨 왼쪽이 이 협동조합 박수홍 대표. 그는 외지인들을 적극 받아들여 지역과 상생을 도모하려 애쓴다. 패스파인더 제공
강릉의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숲에 옹기종기 모인 강릉 투어 참여자들. 아직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패스파인더 제공
강원도 인제에서는 팬슈머들이 아예 냇강두레농업 협동조합의 ‘외지인 조합원’이 됐다.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18명이 각자 20만 원 씩 내고 조합에 가입했어요. 지난해에는 블루베리 수확체험을 했고 올해는 묘목 220주를 심어 생산에 본격 참여하게 됩니다. 땅은 현지 조합원에게 빌리고 묘목은 우리 돈으로 샀어요.

참여자들은 그냥 ‘블루베리 심는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이게 일종의 가치 투자라고 봅니다. ‘지역 상생’이라고 하는 가치에 작은 돈이지만 투자하는 거죠. 그런 걸 많이 늘리는 게 제 사명이예요.”

―패스파인더는 비즈니스로서도 괜찮습니까.

“초기에는 제 돈 많이 썼지만 조금씩 달라지고 있어요. 행정도 생활인구에 관심을 갖게 됐고 지방소멸 대응기금 같은 것도 생겼지요. 특히 지자체에 인구 부서가 생긴 건 큰 변화입니다.”

참여자들에게는 교육비와 현지 여행비 10여 만 원 정도를 받을 뿐, 여행프로그램으로 돈을 벌지는 않는다. 대신 지자체나 지역 기업, 예컨대 강원도 인제의 경우 수자원공사가 ESG 기금에서 일부 비용을 지원해준다고.

● 인생 후반전, 새로운 가능성
“저는 중장년들이 이런 일을 좀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재미있고 사회적인 수요도 있고 당장은 돈이 안 되지만 하다 보면 수익이 날 수도 있고, 내가 가진 재능을 활용할 수도 있죠. 중장년 일자리는 청년 일자리랑은 좀 달라야죠.

누구와 함께 하느냐도 중요합니다. 뜻 맞는 사람들이 ‘으쌰으쌰’ 즐겁게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죠.
경북 고령 투어에서 낙동강변을 산책하는 팬슈머들. 사진에 조예가 깊은 참여자들 덕분인지 패스파인더의 사진에는 촬영수준이 높아보이는 것들이 많다. 패스파인더 제공

게다가 지역에 또 좋은 분들이 많거든요. 아까 언급한 냇강두레농업 협동조합 대표님도 너무 좋아요. 수십 년 동안 지역에 대한 열정만으로 댓가 없이 노력해왔죠. 그를 만난 모든 분은 누구나 어떻게든지 돕고 싶어하더라구요. 그런 분이 곳곳에 있지만 다들 고립돼 있어요. 전 그 분들을 연결해드리고 싶습니다. 생활인구, 관계인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잘 나가던 대기업을 일찍 그만둔 것에 대해 후회는 없나요

“전혀 없습니다. 간혹 예전 직장 동료들도 투어에 참여하는데요, 저를 보면 얼굴이 너무 좋다고 해요. 제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해서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이 “좋은 일인데 심지어 유망하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더 많은 지역에 더 많은 팬슈머들을 만드는 건가요.

“지역이나 참여자가 늘어나면 당연히 좋겠지만, 제가 그걸 다 감당할 수는 없겠죠. 저는 중장년 생활인구의 역할 모델을 만들면 족합니다.”

이런 그는 어딘가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고인이 된 영국 가수 데이빗 보위의 말을 빼놓지 않고 소개한다. 인생 후반전에 임하는 동년배들이 꿈을 꾸고 변신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대변한 것 같아서다.

‘나이듦이란 여러분이 항상 했으면 했지만 하지 못한 그것을 하고, 항상 되었으면 했지만 되지 못한 바로 그 사람이 되는 놀라운 변화과정이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서영아의 100세 카페#이런 인생 2막#패스파인더 김만희 대표#신중년#서울시 50플러스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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