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관은 7월 3일 아침 7시 30분에 할게요. 형은 원래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침 일찍 입관하는 걸 좋아할 거예요.”
“성실하고 순수했던 형”
7월 2일 저녁 8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지하 1층 빈소 앞. 눈물을 머금은 A 씨가 고인의 입관을 언제 할지 묻는 장례지도사에게 이렇게 답했다. A 씨는 전날 사상자 16명을 낸 ‘시청역 역주행 참사’로 목숨을 잃은 38세 김모 씨의 사촌 동생이다. 15세가 될 때까지 김 씨와 함께 살았다는 A 씨는 사촌 형에 대해 “성실하고 순수했던 형”이라고 말했다. A 씨는 “형은 술이나 담배는 일절 하지 않았고,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에 일찍 잠드는 성실한 사람이었다”며 울음을 삼켰다.
A 씨 옆에 앉아 있던 고인의 모친은 “오늘(7월 2일) 새벽 1시 반쯤 며느리로부터 전화가 와서 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며 “병원에서 시신 훼손 정도가 심하다고 유족 중 한 사람만 시신을 보라고 권했지만, 우리 가족은 아무도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다. 아들의 모습을 볼 용기가 안 났다”고 말했다. 이번 사고 사망자 중에는 김 씨와 같은 직장 동료 2명도 포함돼 있다. 이들 세 사람은 용역업체 현대C&R 소속으로 서울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했다. 유가족에 따르면 이들은 시청역 인근에서 함께 전시회를 보고 귀가하던 중 변을 당했다. 고인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지하 1층에 나란히 마련됐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2층에는 참사의 또 다른 희생자인 신한은행 직원들의 빈소도 차려졌다. 고인이 된 신한은행 직원 모두 40, 50대였다. 영정 사진 자리엔 사원증 사진이 걸려 있기도 했다. 유가족은 웃고 있는 고인 사진을 보면서 “얼굴 보니까 이게 (현실이) 아닌 것 같다”며 비통해했다. 숨진 신한은행 직원들은 사고 당일 회식을 했다. 승진·전보 등 인사 발령을 계기로 열린 축하·송별 회식이었다.
“승진 축하하자고 모였는데 변 당할 줄은…”
고인의 동료들은 “좋은 날 축하하자고 모인 자리에서 변을 당할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한꺼번에 4명이나 돌아가시나”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텅 빈 사무실에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 장례식장을 지키는 동료도 있었다. 고인 박모 씨의 대학 동창은 “원래 운동을 한 친구였는데, 지방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열심히 살았다. 직장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안다”며 “항상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친구였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같은 날 오후 8시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는 사고로 숨진 서울시 공무원 김모 씨의 빈소가 차려졌다. 현장에서 기자와 만난 고인의 고교 동창 권모 씨(52)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담배 연기를 연신 내뿜으며 “지난주에 한번 보려고 했는데 안 본 것이 후회된다”고 말했다. 9급 공무원으로 입직한 고인은 생전 5급 공무원으로서 청사 운영 업무를 맡고 있었다. 주말에도 출근해 일을 볼 정도로 열정적인 공직자였다는 게 조문객들의 전언이었다. 권 씨는 “사고 난 장소가 동창들끼리 자주 만나 저녁을 먹던 곳”이라며 “친구 직장이 시청인 것을 아니까 (시청역 참사) 뉴스를 보고 ‘괜찮냐’고 문자메시지를 남겼는데 오늘 아침까지 답이 없더라. 그 후 친구 딸의 전화를 받고 곧장 장례식장으로 왔다”고 말했다. 권 씨는 “그 친구가 두 딸을 낳았을 때 북한산에 나무를 심었다. 나무가 이만큼 자라면 내 딸도 이만큼 자랐다며 자랑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면서 “평소 그 친구는 ‘나는 서울시와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 말할 만큼 자부심과 책임감이 강한 공무원이었다”고 덧붙였다.
현재까지 경찰수사와 목격자 증언 등을 종합하면 참사 당시 정황은 이렇다. 7월 1일 오후 9시 26분쯤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 주차장에서 차모 씨(68)가 모는 검은색 제네시스 G80 차량이 빠져나왔다. 차 씨는 동승한 아내와 함께 호텔에서 열린 처남 칠순 잔치에 참석했다가 귀가하는 길이었다. 호텔을 빠져나올 때부터 과속하기 시작한 차 씨의 차량은 세종대로18길 4차선 일방통행 도로를 시속 100㎞로 역주행했다.
9시 27분쯤 인근 상가 앞 인도와 세종대로18길 차도를 분리해놓은 가드레일을 넘어 시민 11명과 오토바이를 친 후 다시 질주해 횡단보도 위 행인들과 BMW, 쏘나타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사고를 낸 차량은 서울지하철 1·2호선 12번 출구 앞 교통섬 근처에서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이날 사고로 6명이 현장에서 숨졌고 3명은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으나 끝내 사망했다. 가해 차량 운전자 차 씨와 아내를 포함해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사고 현장 인근 가게의 외부 CC(폐쇄회로)TV 영상에는 당시 참상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사고 차량 전조등이 인도 위를 비추는가 싶더니, 1초도 안 돼 피할 새도 없이 행인들을 덮쳤다. 사고 충격으로 불꽃이 튀고 길을 걷거나 서서 대화를 나누던 것으로 보이던 피해자들은 순식간에 CCTV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사고 이튿날 오후 1시 30분 기자가 찾은 참사 현장은 일견 평소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사고 차량이 멈춰 선 시청역 12번 출구 앞 교통섬에 파손된 자동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작은 잔해만 남아 있을 뿐, 자동차들은 사거리를 바쁘게 오갔다. 하지만 사망자가 대거 발생한 상가 앞에 다다르자 사고 충격으로 송두리째 파손된 금속제 가드레일 흔적이 눈에 띄었다. 무단횡단 방지 목적으로 설치돼 강도가 비교적 약한 가드레일이 사고 충격에 엿가락처럼 휜 것이다.
피할 새 없이 덮친 가해 차량
참사 현장 바로 앞 2층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박모 씨(67)는 기자와 만나 사고 직후 참상을 전하며 “회식하러 온 손님들이 사고로 돌아가셨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애통함을 토로했다. 사고로 숨진 신한은행 직원 4명이 박 씨의 호프집을 찾은 손님이었다. 가게에는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화사한 색의 꽃다발 2개가 주인을 잃은 채 남겨져 있었다. 박 씨는 “승진 기념인지 꽃다발을 가져왔던데, 경황이 없어서 가게에 그대로 뒀다. 지금 가져다놓으면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댈 테니 이따 밤에 조용히 가져다놓을 생각”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참사 현장에는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기리고자 올려놓은 흰색 꽃다발 10여 개와 손으로 쓴 추모 메시지가 보였다. 이곳에 헌화한 60대 김모 씨는 “인근 빌딩에서 청소 일을 해 항상 지나다니는 길인데,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며 “근처에서 일하던 가족 같은 분들이 돌아가셔서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인근 한 꽃집 사장은 “오늘 아침에 사고 현장에 두겠다며 조화를 사간 사람만 6명”이라며 “나도 너무 안타까워서 어지간하면 꽃값을 안 받으려 한다”고 말했다. 7월 3일 오후 9시 30분 다시 찾은 참사 현장에는 조화가 80개 이상으로 늘었고, 자양강장제와 소주도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흰색 조화 사이로 고인이 생전에 받았다는 축하 꽃다발도 눈에 띄었다. 와이셔츠 차림의 회사원들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며 묵념을 했고, 길을 지나던 행인도 조화 앞에서 발길을 돌려 두 손 모아 합장을 했다. 이곳에서 만난 한 직장인은 “여기는 인근 직장인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날 이 자리에 없었을 뿐이지 누구라도 당할 수 있던 사고라서 더 슬프고 남 일 같지 않다”고 말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유가족은 물론, 참사 현장을 찾은 시민들도 “사고 원인이 제대로 규명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사고 목격자와 인근 상인들은 “이런 대형 참사가 왜 발생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인근 한 자영업자는 “평소 낮에 일하다 보면 창밖으로 역주행하는 차들이 있어 놀라곤 한다”면서도 “역주행한 차량도 다른 길로 돌아나가기 때문에 큰 사고가 난 적이 없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이상하다”고 말했다.
가해 차량 운전자의 역주행에 대해선 인근 도로 체계의 문제가 한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웨스틴조선호텔 정문에서 빠져나온 차량 운전자 앞에는 사거리가 나온다. 사고가 난 세종대로18길-호텔 후문으로 이어지는 남대문로7길과 한국은행 앞 사거리에서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이어지는 소공로가 교차한다. 호텔에서 나온 차량은 우회전해 시청 앞 광장으로만 갈 수 있다. 사고가 발생한 곳은 시청역에서 호텔 방면으로 가는 4차선 일방통행 도로다. 호텔 쪽에서 바라보면 ‘진입금지(일방통행)’라고 적힌 녹색 표지판이 있지만,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데다 야광 도료로 쓴 것도 아니라서 야간 시인성이 떨어진다. 기자가 참사 발생 이틀 후인 7월 3일 사고 시점과 같은 오후 9시 30분쯤 현장을 찾아 확인해보니 해당 표지판은 어둠 속에 잘 보이지 않았다. 시청역 쪽에서 오는 자동차 전조등과 버스 번호가 적힌 전광판 빛에 가려 더 그랬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들어 역주행했다고 해도, 가해 차량이 빠른 속도로 질주해 연이어 행인들과 다른 차량들을 친 이유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가해 운전자 차 씨는 경기 안산시에서 20인승 시내버스 운전사로 일하고 있으며, 40여 년간 운수업에 종사한 베테랑이다. 현재 68세로 비교적 고령이나 운전 미숙을 사고 원인으로 보기는 어려운 이유다. 차 씨는 자기 차량이 급발진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동승했던 아내도 경찰 참고인 조사에서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았다”며 비슷한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차 씨가 아내와 부부싸움을 한 후 풀악셀을 밟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경찰은 사고 차량 블랙박스 음성 기록에는 차 씨 부부가 “어, 어”라고 외치는 목소리만 담겼다고 밝혔다.
“급발진 주장 인정되기 어려워 보여”
가해 차량 운전자의 급발진 주장에 대해 자동차급발진연구회 회장인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교통사고를 내고 급발진 핑계를 대는 사람이 적잖은 게 현실”이라며 “이번 사건이 급발진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 나온 각종 정황은 가해 운전자에게 불리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대법원 판결이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감정, 기업의 자체 검증 결과 자동차 급발진이 인정받은 경우는 없다.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인 정경일 법무법인 엘앤엘 대표변호사는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나온 사고 당시 영상을 살펴보면 가해 운전자의 급발진 주장이 인정되긴 어려워 보인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간 급발진 사고로 의심된 사례는 자동차가 통제 불능에 빠져 비정상적으로 주행하고 운전자가 다른 사람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려는 모습이 관찰되거나, 내부 블랙박스에 운전자가 ‘차량이 통제 안 된다’고 외치는 음성이 기록된 경우가 많다. 이번 참사를 일으킨 가해 차량 운전자가 급발진을 주장하는 만큼 면밀한 수사가 필요하겠지만, 경찰수사가 급발진을 전제로 이뤄져선 안 될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차 씨를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입건하고, 주요 참고인 조사에 나서는 등 수사를 본격화하고 있다. 경찰은 차 씨가 몰던 제네시스 G80의 엑셀 및 브레이크 작동 상황이 저장된 사고기록장치(EDR)와 피해를 입은 차량 2대의 블랙박스 영상, 현장 주변 CCTV 영상 등을 국과수에 보내 정밀 감식·감정을 의뢰했다. EDR 기록을 자체 분석한 경찰은 사고 직전 차 씨가 엑셀을 강하게 밟았다고 1차 판단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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